주기철 목사는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한국 교회를 지킨 믿음의 사도’다. 그는
얼어버린 땅 속에 심겨진 한 알의 밀알이었고, 들불에 타버린 광야에 핀 한 떨기 백합화였다. 그는 죽음으로써 한국 교회를 다시
살렸다.
주기철 목사는 1897년 경상남도 창원 웅천에서 태어났다. 증농 정도의 가정이었던 그의
가정에서는 1910년 큰형 기원이 처음 예수를 영접했고, 형의 영향을 받은 주기철 목사가 믿음을 갖게 되었으며 이어 모든 가족이 믿게
되었다.
소년 주기철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후 정주 오산학교를 나와 서울 연희전문에
진학했으나 질병으로 인해 중퇴하고 고향으로 낙향했다. 고향에서 주기철 목사는 믿음이 좋은 아내를 만나 결혼했으며, 마침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 부흥회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후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주기철은 1922년 3월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4년만인 1925년 12월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내내 방학을 이용하여 고향 웅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했고, 졸업 후에는 부산 초량교회에서 6년, 고향 문창교회에서 5년 동안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초량교회 재임 중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고, 경남노회 부노회장을 세 차례 역임했고, 문창교회 시절에는 경남노회 노회장을
지냈다. 1929년에는 경남노회의 신사참배 거부 결의를 주도했다.
1935년 12월, 주기철 목사는 평양신학교에서 열린 학생신앙부흥회에 주강사로 초빙됐다.
그 부흥회에서 주기철 목사는 그 유명한 ‘일사각오’ 설교를 했다. 일제의 가혹한 신사참배 압력이 모든 교회에 가해지고 있던 때였다. 장로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단이 신사참배를 받아들였고, 이를 거부하는 목회자와 교인, 학교와 교회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주기철 목사는 ‘예수를 따라, 이웃을 위해, 부활의 진리를 위해 죽겠다’는
각오로 믿음을 지킬 것을 설교했다. 미래의 목회자가 될 신학생들에게 죽음을 각오한 순결한 믿음을 강조한 이 설교를 통해 주기철 목사의 명성이
전국에 알려졌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눈초리는 더욱 강퍅해졌다.
1936년 6월,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주기철 목사를 청빙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산정현교회는 길선주 목사 소천 이후 후임목사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었는데, 조만식 장로가 중심이 되어 산정현교회를 이끌 목회자로 40대 초반의
주기철 목사를 청빙한 것이다.
주기철 목사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보다 강력하게 저항하기 위해서는
한국 교회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평양이 제격이라 생각하고 청빙을 받아들였다. 산정현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일제의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범하는 것이므로 철저히 배격하며, 신사참배를 한 신도는 지위와 직분을 불문하고 출교한다’는 당회 결의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더욱 강력하게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하는 교인, 교회, 학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드디어 1938년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끝까지 거부했던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에게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거부의 괴수’였고, 그를 향한 탄압의 강도는 날로 심화되었다.
갖가지 죄명을 내걸고 구속했고, 견딜 수 없는 고문으로 주기철 목사를 핍박했다.
1938년 2월, 이른바 ‘장홍련 사건’으로 구속된 이후 1940년 6월까지 다섯 차례에
거쳐 구속되어 모두 합쳐 약 3년 동안 수감되었다. 그때마다 참을 수 없는 고문과 회유가 이어졌으나 끝내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1939년 2월 2차 구속 후 잠시 석방되었을 때 주기철 목사는 그의 마지막 설교가 된
‘다섯 종목 나의 기도’를 산정현교회에서 2000여 명의 교인과 일제 고등계 형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행했다. 유언이 된 설교에서 주기철
목사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 주십시오,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해 주십시오, 늙으신 어머니와 가족, 교우를 주님게서 지켜주십시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해주십시오, 내 영혼을 주님께 의탁합니다’라고 설교했다.
결국 그는 다시 구속되었고, 일제의 압력에 굴복한 장로교 평양노회는 목사직을 면직했으며,
산정현교회는 폐쇄되었다. 1940년 4월 잠시 가석방되었으나 두 달만에 재구속되었다. 마지막 구속이었다.
1년 여 동안 경찰조사 과정에서 극심한 고문을 당했고, 1941년 8월, 2년 8개월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다. 형무소 안에서도 주기철 목사는 궁성요배를 거부했고, 참혹한 고문을 그 대가로
받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투옥된 적지 않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형무소 안에서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경우가 적지 않았으나 주기철 목사는 넘어지지 않았다. 결국 1944년 4월 21일, 오랜 고문과 핍박에 반주검이 된 주기철 목사와
가족의 마지막 면회가 이루어졌다. 일제는 주기철 목사 가족에게 임종을 집에서 해도 좋다고 했으나 주 목사와 가족은 이를 거절했다. 오히려
형무소에서 주님의 품에 안기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날 밤 9시, 주기철 목사는 주님 품에 안겼다.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한 분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 교회사에 영원히 남아 있을 찬란한 별, 주기철 목사는 이렇게 48년 동안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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