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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도회 | 순교자 김관주(1904~1950)
김관주(1904~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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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공산주의에 저항하며 기독교 신앙 지켜 *장로교 목사 / 평안남도 안주 *북한 공산치하에서 순교 김관주 목사는 1904년 평안남도 안주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안주동교회 김현하 영수, 어머니는 김정숙 권사다.
김관주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법관이 되기 위해 일본 동지사대학 법학부에 입학했으나 대학 재학 중 동경의 일본신학교로 옮겼다. 법을
공부하던 중 나중에 법관이 되면 독립운동을 하던 동족을 구속하거나 재판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어 평소 생각하던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일본신학교를 졸업한 김관주 전도사는 1937년 신의주제2교회에 부교역자로 부임했다. 당시 신의주제2교회의 담임목사는 한경직 목사였는데,
한 목사는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김관주를 만나 그의 믿음과 비전을 보고 훗날 자신의 동역자로 부른
것이었다. 당시 한경직 목사는 일제에 의해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교회에서의 설교권이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는데 자신의 설교를 대신할 목회자로
김관주 목사를 초빙한 것이다. 그는 부임 1년 만에 교인들의 사랑을 받는 설교자요 목회자로 자리매김했다. 1941년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한경직 목사를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비난하며 신의주제2교회 담임목사에서 쫓아냈다. 김관주 목사는 이처럼 뜻하지 않게
신의주제2교회의 담임목사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는 해방 후 한경직 목사가 월남한 1946년까지 약 8년 동안 계속되었다. 김관주 목사는 목회를
하면서 항상 한복을 입었으며,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설교와 기도할 때마다 한국어를 사용했다. 한편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아내는 교회 안에
애린의원이라는 병원을 세워 의사로 헌신했다.
해방된 뒤에도 김관주 목사는 신의주제2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당시 의산노회장이던 김 목사는 1946년 3월 1일, 해방 후 첫 번째
3.1운동 기념식을 신의주동교회에서 개최했다. 이날 공산주의자들이 교회에 난입하여 행사를 방해했으며 교계 지도자들을 끌어내 거리행진을 시키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 일이 발생한 후 김관주 목사는 신도대회를 열어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성토했고,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관주 목사는
신의주에서의 목회활동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게 되었고, 1947년, 김관주 목사는 평양의 서문밖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평양에서는
기독교자유당을 결성해 기독교 정신을 펼치자는 정치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김관주 목사도 이 일에 동참했다. 그러나 창당 거사 하루를 앞두고
김화식 목사와 김관주 목사 등 주동자들이 모두 검거됐다. 1947년 11월의 일이었다. 김관주 목사는 평양 인근 사동탄광에서 강제노역 형에
처해졌고, 1950년 6월 23일, 6.25 전쟁 도발 이틀 전에 순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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