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과 10월 내내 전라남도 영광군 염산면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이어졌다. 9월 말에는 야월교회 김성종 영수를 비롯한
65명의 교인이 빨치산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10월에는 이웃 염산교회 교인 77명이 설도항 바다에 수장되었다. 이외에 백수교회, 묘량교회,
법성교회, 영광읍교회 등에서 모두 197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학살이 난무하던 6.25전쟁 기간
중에서도 영광군 염산면은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낳은 아픔의 지역이었다.
김방호 목사는 당시 염산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1895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그는 스물네 살 때 일어난 3.1운동에 아버지와 함께
참여하였다가 아버지는 일제의 총탄에 숨졌고, 자신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에 참여했다. 독립군의 독립자금 모집책으로 국내를
오가던 어느 날, 함경도 산골지역에서 열ㄹ린 어느 교회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열병을 앓았다. 그날
이후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날로 개성으로 가서 남감리교가 세운 미션스쿨인 한영서원에 입학했다. 한영서원을 졸업한 후에는 충남 서천과 전북
김제, 전남 장성 등지에서 교원 생활을 하며, 소룡리교회에서 장로가 되었다.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따라 1927년 평양신학교에 들어가 6년만인 1933년 28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의 첫 사역지는 전남
영광읍교회였다. 이어 전남 신안의 덕산교회, 나주 상촌교회에서 시무했다. 해방될 때에는 영산포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었으며, 6.25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인 1950년 3월, 영광군 염산교회에 부임했다.
공산군의 진입이 가까워졌을 때 교인들은 김방호 목사에게 피신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양떼를 두고 갈 수 없다며 교회를 지켰다.
전쟁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주민 사이를 갈라놓았고, 서로를 의심하며 반목하게 만들었다. 약 3개월의 공산 치하 후 국군이 염산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많은 주민들이 환영행사를 벌였다. 그러나 아직 산속에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공산군들이 남아 있었다. 이후 약 한
달 동안 염산면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살륙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염산교회에서는 10월 7일, 교회가 불태워지고 13명의 교인이 피살되었고, 이후 배교를 거부한 교인들은 목에 바위를 달고 설도항 바다에
수장되었다. 그리고 10월 27일, 김방호 목사의 일곱 가족이 한날한시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몽둥이로 매를 맞았고, 목에 바위를 달아 바다에
던져졌다. 이때 염산교회에서 순교한 이들은 모두 77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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