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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전도회 | 순교자 박경구(1903~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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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작성일 :20-10-16 17:46   조회 :79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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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하고 투옥 중 해방

*장료교 목사 / 황해도 황주

*북한 공산정권의 박해로 투옥, 순교

 

 

박경구 목사는 1903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박태화 장로는 한국교회 최초의 해외 선교사인 박태로 목사의 동생이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박경구는 숭실하교와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했는데 재학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가족과 친지 모두가 목회자의 길을 갈 것으로 기대했지만 박경구의 생각은 달랐다.그는 교육을 통한 애국애족의 길을 가겠다며 교육게에 투신했다. 황해도 신천의 경산학교 교사를 거쳐 진남포 득신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애초 사리원 덕성학교 교장에 초빙되었으나 젊은 시절 3.1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트집 잡은 일제에 의해 거부되어 수년 간 덧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득신학교 교장에 취임한 박경구는 교육에 전념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교육을 통한 애국의 길을 가던 박경구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931년이며, 10년 만인 1941년 졸업했다. 그가 신학교에 재학하던 시기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을 향해 치달리던 때였다. 기존의 평양신학교는 1938년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 자진해서 문을 닫았고, 이듬해 일부 목사들에 의해 ‘친일 평양신학교’가 문을 열는 등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고, 박경구 역시 졸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의 나날을 보냈을 것이다. 어던 일이 있어도 목회자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한 박경구 목사가 졸업한 신학교는 ‘친일신학교’인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황해도 장연군 서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비록 신사참배를 인정하는 신학교를 졸업했지만, 교회에서 신사참배는 결코 할 수 없었다. 일제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박경구 목사는 예배에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며, 결국 서부교회를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4년 겸이포중앙교회에서 목회를 다시 시작했지만, 일제의 탄압에 더는 견딜 수 없어 아예 교회를 떠나 과수원을 경영하며 은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그를 정방산 비밀결사 사건을 조작하여 1945년 4월 구금했으며, 결국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박경구 목사는 원래 담임했던 장연 서부교회로 돌아와 교회 부흥을 위해 헌신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일했다. 교회는 날로 성장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이 그를 놔두지 않았다. 공산정권이 조직한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할 것과 공산주의에 동참할 것을 강요했으나 죽기를 각오하고 거절했다. 북한이 6.25전쟁을 시작하기 하루 전날, 박경구 목사는 체포, 해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시신을 가져가라는 통지를 받고 가족이 찾아갔을 때 박경구 목사의 몸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꺾여 있었다. 모진 고문 끝에 순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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