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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요7:40-48 +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요7:40-48 +
믿음이란 짧은 시간에 끊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기간에 걸쳐 인생과 우주 전체를 보고 생각해야 합니다. 순간의 잘못을 탓하며 자학하고 절망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절망하고 자학하는 것은 믿음의 관점을 놓친 데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믿음은 일의 진행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만큼 논쟁과 토론의 대상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예수는 죽었는가, 살았는가!‘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인간의 아들인가!’‘예수는ㅠ초인인가, 범인(凡人)인가!’‘예수는 구세주인가 성자인가!’‘예수는 역사인가, 신화인가!’이런 주제들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왜 2천년 동안 예수님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것일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죽은 자에 대한 논쟁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 계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분에 관한 논쟁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1. 세 부류의 사람
첫째는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한 집에서 같이 자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우리가 너의 집과 부모를 아는데, 네가 메시아라니.” 그래서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셋째는 예루살렘에 있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린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더욱이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민중의 선동가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선량한 민중을 혹세무민한다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따르는 무리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한편의 무리들은 예수님을 좋아하고 환영하며 따랐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의 무리들은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이고 의심하며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영원한 생명의 떡, 생수를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논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 길을 가십니다. 십자가의 길, 전도자의 길을 가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체포하러 오는 무리들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담대하게 영원으로, 행복으로 초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2.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단계를 넘어 그분 없이 못 산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와 위치와 신분을 인정하고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믿음의 단계를 넘어, 주관된 인격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님을 사랑한 사람 중에 옥합을 깨뜨린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고 머리카락으로 씻겼습니다. 우리는 그 여인에게서 깊은 사랑의 고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도 물 길러 왔다가 물동이를 우물가에 내버려두고 동네로 뛰어들어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여인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교감하고 있습니다. 간음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양쪽 십자가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한편의 강도는 스스로 재수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마음에 각인되는 일입니다.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3. 왜 우리는 그분을 위해 희생하지 못하고 죽지 못하는 걸까요?
우리는 말이나 생각 그리고 교리적으로‘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 속에 생생한 흔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층의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하속들의 말에 의하면 예수 같은 분은 없다고 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지금까지 어떤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는 영적 권위와 탁월성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원과 탄생에도 독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 치유와 회복에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그분은 문둥병자, 앉은뱅이, 눈먼 사람, 혈루병에 걸린 사람 등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는 일에 독특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정상으로 돌아오게 했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 같은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말하고, 삶으로 그 말을 증거한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47~48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속들을 보낸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예수를 잡으러 갔다가 도리어 예수에게 빠진 게 아니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을 보게 되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좋겠다는 풍족한 표정을 보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세상에 주님과 같은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이 흔적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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