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칼럼
현재 위치 : 커뮤니티 > 목회칼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1-10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1-10 +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바리새인의 종교는 피상적이고 외식적이고 또 의식적인 종교였습니다. 다시 한 마디로 얘기해서 껍데기에 관심을 갖는 그런 종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정한 본질은 겉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면서 바리새 종교를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럼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내면이 중요한 것입니다. 8복에 대한 모든 내용들이 내적인 의에 대한 접근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이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적인 의가 다른 행위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 니다. 영어로 표현한다고 하면 먼저 비잉Being(존재)의 변화가 있고 난 다음에 두잉Doing(행위)의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행동이 변화되면 존재가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변화되면 행동이 변화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변화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냐 있죠? 바리새인이죠!
1. 긍휼이라는 것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친절입니다.
시편 119편 64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무슨 이야기입니까? 주의 인자하심이 바로 긍휼 헷세드입니다. 더 자세한 얘기를 창세기 32장 10절에서 보시겠습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여기에서 은총이라는 단어가 헷세드입니다. 이것이 또 긍휼이에요.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도망치고 그 다음에 돌아올 때까지 야곱이 하나님께 긍휼을 받을 근거가 없었습니다. 아버지 속이고 형 속이고 사기 치고 그가 잘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야곱을 연구할 때마다 당황하는 이유가 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은혜를 주셨는지 근거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자격도 근거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품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도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긍휼과 모든 진리를 감당할 수 없사오나.” 구원받은 모든 백성들은 이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유 없는 사랑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자격이 없는 사랑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쁜, 사랑받을 근거가 없는 사랑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긍휼 받은 백성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의아해 해야 합니다. 자꾸만 ‘왜’를 물어야 합니다. 왜 구제해요. 여기 왜 왔어요?’ 왜? 왜? 왜 우리는 대답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긍휼입니다.’
2. 긍휼의 실제를 든다고 하면 용서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37편 21절을 보시겟습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은혜라고 번역된 것이 헷세드입니다. 의인은 긍휼을 베풀고 준대요. 의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긍휼이 있으면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또 다른 말로 보면 용서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긍휼이 있어야 용서가 있어야 성장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긍휼이 있어야 되고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큰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실수했던 모든 것 하나도 용서받지 아니하고 다 징계 받았다고 하면 절대로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용서받고 또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도 용서의 산물 아닙니까? 야곱의 아들이 12명 있었습니다. 12명이 있었는데 11번째 아들 요셉을 팔아먹었지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원수같던 10명의 형제를 만났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용서를 베풀지 않고 긍휼을 베풀지 않고 ‘너희들 네 죄를 네게 알렸다. 목을 쳐라!’ 10명의 형들의 목을 쳤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두 지파밖에 없잖아요. 요셉과 베냐민! 이스라엘 지파가 생긴 것이 긍휼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3. 우리는 베풀고 기도하고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물질적인 면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돈으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집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그런 긍휼을 베풀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긍휼함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디를 대상으로 삽니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대상으로 살아갑니다.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긍휼을 베푸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영혼이 지옥갈 영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바라보고 영혼을 위한 울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타인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진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고 스데반도 그랬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범하고 있나이다.” 라면서 긍휼의 모습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 해야 될 일이 복음증거해야 합니다. 긍휼의 최고의 사역이 무엇이냐 하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증거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균형을 갖추어야 합니다. 물질적인 긍휼과 동시에 영적인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유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 살리기 위해서 육체를 살리기 위해서 나눠 주고 베풀어 줄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