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권능 빌3:7-12 + 작성자 섬김이 작성일20-04-20 15:03 조회540회 댓글0건 관련링크 목록 본문 부활의 권능 빌3:7-12 + 부활을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끔은 교인들 중에서도 부활신앙만을 예외로 생각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면 기독교는 없어집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논리적인 이야기가 아닙입니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사건 위에서 부활 신앙이 세워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부활이 없다면 전부가 허구입니다. 의의, 자유, 평등, 선, 진리, 사랑, 인내, 등 무슨 이야기를 해도 부활의 없으면 거짓말입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참아야 할 이유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빼앗아도 모자라는 세상에 남을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말로도 부활 없이는 진리와 의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진리니 선이니 하고 부르짖는 것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도덕, 윤리는 꽃병에 꽂아 놓은 꽃입니다. 뿌리가 없기에 생명이 지속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정의는 죽을 수가 없기에 예수는 부활했고,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말입니다. 즉 진리가 영원하기 때문에 예수가 부활했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입니다.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예수가 부활하셨기에 진리가 영원한 것이고, 사랑이 영원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론처럼 만일에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주장은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모든 외침은 다 쓸데없는 메아리로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오늘이 있기에 내일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이 있기 때문에 오늘은 믿는 것입니다. 약속된 미래가 있기 때문에 오늘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 부활의 신앙에 근거하여 우리는 오늘을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식물이 싹이 나고 시들고 다시 나는 것처럼 자연적인 생명의 과정이 아닙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창조의 계시 입니다. 불교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환생이나 윤회도 아닙니다. 옛 것에 대한 훼손이나 발전도 아닙니다. 옛것의 완전한 죽음에서 이루어지는 재창조의 역사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역사입니다. 사람에게는 죽이는 능력이 있지만 살리는 능력은 없습니다. 부활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바로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부활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것입니다. 비겁에 벌벌 떨던 베드로였지만 부활 진리를 믿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러한 증언을 합니다. 행 2:32 "우리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고 하나님은 그를 부활시켰습니다. 여기에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능력이며 권능입니다. 우리는 부활이 십자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고통, 그 죽음 뒤 에 부활사건이 있음을 중시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창조는 무에서 유의 창조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권능으로 나타나는 창조는 십자가 위에 세워지는 창조입니다. 이것이 더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권능임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의로운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계시된 것입니다. 또한 사랑이 담긴 희생의 죽음이었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죽는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자발적인 것이었다고 성경은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예수님은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죽지 않으실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피할 길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유월절에 들어오시지만 안 했어도, 만약에 빌라도 목전에서 한 마디만 잘 말씀했어도 죽음을 면할 수는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것이 납득되지 않아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데 왜 말이 없느냐"고 답답해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자발적이요, 의인이면서도 죄인인 것처럼 이렇게 죽어갔습니다. 이 자원적인 죽음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부득이 하여 죽는 죽음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내가 죽어야 십자가입니다. 죽여서 죽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을 선택하는 선택적인 죽음이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대신 죽으시는 죽음이 십자가입니다. 죽을 자를 위하여 산 자가 대신 죽는, 즉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 죽으신 것입니다. 이 완전한 죽음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면 능력이라고 합니다. 꼭 살아남아야 하고, 복을 받아야 하고, 무엇이든 잘되는 것, 즉 십자가 없는 능력을, 십자가 없는 영광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진 후에라야 하나님께 그를 일으키시는 능력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간혹 괴변을 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우리의 고난을 담당하셨으니 우리는 편안해야 한다는 얌체 같은 발상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를 쳐다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찌 편안하기만을 바랄 수 있습니까? 생각한다는 것이 겨우 편안해야 한다니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은 헛된 신학입니다. 죄로 인한 죽음 저주의 고통, 심판의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의 고난, 선물로 주시는 시련, 우리를 교육하시는 훈련, 의로운 자의 고난, 그리스도인의 순교,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순교를 영광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 고난은 곧 부활의 능력을 함께 체험하게 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