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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룬 신33:1-5 +
여수룬 신33:1-5 +
행복’이란 오래전부터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행복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며,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행복의 역설이 있습니다.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행복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집니다.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지만, 어느 순간 공부가 무거운 짐이 됩니다.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지만, 일이 도리어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행복이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행복해지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신명기는 오랜 시간과 장소를 넘어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행복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이미 충만하시기에 풍족하시며, 그 누구보다 강하시기에 안전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이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분의 풍요와 안전을 받을 것입니다. 혹시 지금도 행복을 위해 쉬지 않고 달리고 계시다면, 행복을 위해 열심히 살고 있음에도 불행을 경험하고 계시다면, 신명기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여 보십시오. 출애굽 후 아직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넘쳐흐르는 농산물도, 그것을 안전하게 보호할 만한 크고 안전한 집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미 행복자입니다.
신명기 33:1-5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영감표현에 ‘여수룬’이란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명기 32장 15절에나 33장 5절, 33장 26절에 이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 44:1-2에도 영감의 사람 이사야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 …나의 택한 여수룬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여수룬’그 의미는‘이는 하나님께서 ‘옳게 보아준 백성’ 또한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을 뜻하는 애칭적 별명이며, 또한 시적으로 표현한 말이며 신명기 33장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수룬의 행복, 곧 이스라엘의 행복이 무엇인가? 여수룬의 행복이 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 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33장 2절에 “그가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추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시내에서 오시고’라 함은 완료진행형으로, 지난날 모세에게 오신 그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해서 모세와 그 백성을 찾아오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여수룬(이스라엘)의 행복은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복도 하나님 편에서 그를 찾아오심에 있었습니다. 이삭과 야곱의 행복도 하나님 편에서 그를 찾아오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결과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고 열국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삭을 찾아오고, 야곱을 찾아오신 결과 저들의 인생여로에는 예기치 못한 온갖 축복의 샘물이 터졌습니다. 저들은 새로운 삶의 축복의 경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를 찾아오신 결과, 그는 종된 애굽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새로운 존재적 사명과 목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선민 이스라엘의 생활헌장인 율법 즉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심이 행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왔을 때 유월절을 체험했습니다. 출애굽의 거사를 체험했습니다. 홍해의 기적, 마라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메추라기와 만나, 반석에서 생수가 남을 체험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체험했습니다. 40년 동안 불기둥 구름기둥의 은총을 체험했습니다. 농사짓지 않고, 길쌈하지 않아도 300만 명에 가까운 저들의 의식주가 해결이 됐습니다. 성경이 인류에게 주는 축복의 소망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 편에서 죄인 된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찾아오신 그 자체가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만백성, 만국들 중에 하나님이 유독히 이스라엘(여수룬)을 찾아오셨음이 행복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선택의 방문을 뜻합니다. 그것은 자원적 사랑의 방문을 뜻합니다. 그것은 목적적 방문을 뜻합니다. 바로 여수룬의 구원을 목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이요 불변적인 영생을 약속한 방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여수룬)에게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오시는 역사입니다. 목자 편에서 양을 찾는 역사입니다. 아버지 편에서 죄인인 탕자를 먼저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는 역사입니다. 아버지 편에서 달려가 아들탕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는 역사입니다. 아버지 편에서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그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주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살진 소를 잡고, 동네 사람을 초청하여 잃어버린 내 아들, 죽었던 내 아들을 다시 얻었다고 소리치며, 다시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역사입니다. 이런 경우 그 아들은 행복 자가 아니겠습니까? 누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그 탕자의 행복을 대적하겠는가? 송사하며 정죄하겠습니까? 누가 이 부자의 생명적 사랑관계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기근이나 적신입니까? 그 무슨 위험이나 칼이라도 이 부자의 생명적 사랑관계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은 여수룬의 행복입니다. 이스라엘의 행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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