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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룬Ⅱ 신33:1~5 +
여수룬Ⅱ 신33:1~5 +
어떤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이 이스라엘에게 행복이 되시는가? 이스라엘(여수룬)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만백성, 만국들 중에 하나님이 유독히 이스라엘(여수룬)을 찾아오셨음이 행복이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선택의 방문을 뜻합니다. 그것은 자원적 사랑의 방문을 뜻합니다. 그것은 목적적 방문을 뜻합니다. 바로 여수룬의 구원을 목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이요 불변적인 영생을 약속한 방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여수룬)에게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오시는 역사입니다. 목자 편에서 양을 찾는 역사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행복이시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1.일어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본문 2절중에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세일산’은 험한 산악지대입니다. 창세기 36장 21절에 보면, 이 세일산은 에돔땅으로 세일의 자손중 호리족속들이 살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별명입니다. 에서의 자손들이 세일산의 원주민 호리족속을 정복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사실상 에돔과 동맹을 하고, 이스라엘과 대적관계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입니다. 신명기1:44절에는 세일이 하나님의 원수로 나타나 있습니다. 역대하20:1-25절에는 암몬과 모압과 세일산 지역의 거민들이 일제히 동맹을 하고 일어나 유다 왕 여호사밧을 침공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유다 왕 여호사밧과 그 백성들은 금식을 하고, 주의 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결사적인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떼를 지어 찬송하면서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때 갑자기 ‘여호와의 복병’이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의 복병은 암몬과 모압 자손과 세일산 거민들로 하여금 저희들끼리 살육하며 피차 망하게 하였습니다.
여기 우리에게 보여준 성경에 「여호와께서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라고 함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관계되어 나타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일산에서 일어나셨다고 함은 선민의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급하게 행동하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 자신의 초비상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란산에서 비취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다시 본문 신명기 33장 2절 중에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바란산’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지나가던 광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신명기 1장 19절에는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은 불모의 고지대로서 해발 800m가 넘는 높은 산악지대입니다. 말하자면 죽음의 장소와 방불한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곳입니다.
이러한 바란산에서 여호와께서비취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가리켜 신32:10절에는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바란’은 황무지요,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입니다. 절망과 죽음의 장소입니다. 불안과 공포의 장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전혀 소망이 없는 장소입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입니다.
바로 오늘의 지상 교회는 바란광야를 통과하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은 영적으로 황무지요, 무서운 영적인 맹수들이 삼킬 자를 찾아 부르짖고 있는 장소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유린하는 온갖 유의 영들의 환경들과 맹수들이 출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이사야는 사9:2말하기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빛, 예수 구원의 빛, 성령의 빛, 계시의 빛을 받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의 바란광야가 실로 무섭고 사납지마는 그래도 태양이 하늘에서 열량을 뿜어주듯이, 하나님의 각양 좋은 은사 때문에 우리는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3.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행복자입니다.
본문에 표현된 ‘일만 성도’란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을 수종들기 위하여 동원되는 수많은 천사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천군천사를 대동하신 가운데 이스라엘 중에 강림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강조한 근본 뜻은 예수님의 세상 초림과 끝날의 재림을 포함한 구원사적 임함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자신의 실존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임함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이 성육신적 강림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였습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 가운데 거하며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친히 본 사람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 본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초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고, 영광스러운 예수 재림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오실 때는 그 영광의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한번 나타나시는 그 날에는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이 여수룬(이스라엘)에게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행복은 바로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것이 행복이란 말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저들의 세계관이요 우주관이며, 존재적 인생관이며, 구원관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저들의 최고선이며, 최고 가치며, 최고의 목적된다면 실로 행복한 여수룬이 네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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