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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주는 의미 수24:1-7 +
장소가 주는 의미 수24:1-7 +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질문을 합니다.“한 사람이 평생 제일 많은 꽃을 받는 때는 언제일까요?”그런데 답은 참 쓸쓸합니다. 내가죽어 조문의 주인공이 됐을 때이니까요. “사람들은 내가 보내준 꽃을 반갑게 느끼지 못하고 내가 보지도 못할 때 한꺼번에 꽃을 받게 된다면, 즉 죽은 다음에 받는 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모든 삶의 모든 부분들을 다시 해보며 하나님의 시각에서 재평가해야 합니다. 이것이 맞는 이야기인가 틀린 이야기인가! 세겜에서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모아 놓고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너희들 왜 하나님 섬긴다고 하면 하나님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스스로가 만든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길과는 다른 세속적인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사는 악한 자들을 모두다 멸하라고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어울려 살면서 그들의 풍습을 받아드렸습니다.
세상을 따라 살다 보니 심지어 하나님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양심 주머니를 만들어놓고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꺼내 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안다는 것이고 그러한 분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이며, 이때 그 예배는 섬기는 것입니다.
1. 섬긴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예배란 하나님께 섬김을 드린다라고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문제는 예배란 하나님께 섬김을 드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받으려고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은혜를 받기 위함이라는 말은 듣기에 매우 그럴듯하게 보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 된다는 것은 큰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배의 주인공이 예배하는 자신이고 하나님은 나를 빛나게 해 주는 조연에 불과하다면 과연 그 예배가 참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예배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예배를 통해 주어지게 될 결과물에만 집착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진짜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는 것 같습니다. 기복주의라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섬길 때 주어지는 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신앙 같지만 실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관계를 통해서만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지·정·의가 있는 존재가 하나님이고 또 인간이라면 지·정·의가 있는 존재인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경배하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내 맘 아시지요, 네가 이렇게 살아도 이렇게 믿어도 내 맘 아시죠. 일방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관계로서의 섬김이 아니라 우상으로의 섬김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2.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관계를 깨버리는 것입니다.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 세상 가운데에서, 즉 세겜에서(세겜이 어디 있느냐,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우상을 제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21세기에 우리의 모든 관계가 지금 다 깨지고 있습니다. 기계적인 관계가 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인격적으로 접근해야 됩니다. 인간은 지·정·의가 있습니다. 세 가지가 다 만족이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만족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 섬길 때 에도 인격으로 하나님을 섬겨야지요. 지성을 다해서 감성을 다해서 의지를 다해서! 그래야 관계가 형성된다니까요. 우상에는 그것이 없잖아요.
3.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동역자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교묘하게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치시켜 버립니다. 관계가 아닌 것으로 다 끊어 버립니다. 여러분! 우리도 느껴야할게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우상적인 요소가 있었거든요. 모여서 설교나 듣고 집에 가고 죽어있는 신앙인이요 죽어있는 교회요, 죽어있는 예배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죽어 있는 부분의 관계가 살아나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교회 오면 아버지를 뵐 수 있어 기뻐요 왜요 기쁘면 기쁜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아버지께 위로받을 수 있잖아요 교회 오는 목적이 뭐에요, 예배드리기 위함이다.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성도 간에 교재도 있어야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는 놀기도 해야 돼요. 대화도 나누고 그래 야 돼요. 공동체 의식이 있잖아요. 이제부터 우리가 모든 부분에 다 살려야 할 것이 관계라는 것입니다! 관계라는 개념에서 이해한다고 하면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넘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나아가서 오늘 본문은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선물이라고 가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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