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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것은? 눅15:18-24 +
가장 아름다운 것은? 눅15:18-24 +
여러분 세상을 살아갈 때 망하고 살고 싶습니까? 흥하고 살고 싶습니까? 그럼 망하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따라합시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하나님을 알면 망하지 않습니다. 아니 성공합니다. 흥합니다.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육적인 문제까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습니다. 오늘본문에도 하나님을 찾아와 흥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하나를 찾는다면 눅15장에서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온 장면을 꼽을 수 있습니다. 본문21절에 보면 자기를 성찰하고 말한 고백이 나옵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아버지의 아들로서 인정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을 들은 아버지는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른말하는구나! 이렇게 반응하지 않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는 내 아들이다.” 하면서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줍니다. 그리고 본문24절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고 즐거워하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입니다. 이렇게 성찰과 긍휼이 만나는 장면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일까요
바로 자기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입니다. “하나님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죄인입니다, 정말 허물 많은 종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고백할 때 그 모습이 너무너무 아름다워 보입니다. 우리는 다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상처받은 사람도 많고, 아프고, 깨지고, 실패를 경험한 보잘것없는 인생이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탕자와 같은 우리가 아버지 집에 모였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는 아니 몹쓸 것은 거의 다가지고 있는 우리들이 교만과 오만과 턱없이 부족한 자존심, 그놈의 고집은 또 왜이리센지 황소고집을 떠나 고래심줄이고 허랑방탕한 탕자의 기질은 왜 하나같이 똑같은지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기위해 아버지 집에 교회에 모였습니다.
아름다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성찰하고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불쌍히 여겨주시리라는 긍휼을 바란다면 우리가 아무리 마른 막대기 같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면 위대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것임을 믿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주님의 긍휼로 안아주시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우리는 왜 예배를 아름답게 여깁니까? 예배에서 감격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자기를 성찰하고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나와서 주님의 긍휼을 받는 일이 예배를 통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만나면 우리는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의 종교라 하는 것입니다. 자기성찰 즉 회개와 긍휼이 만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으로 불행했던 사람이 행복한 사람으로, 가난한자가 부요한자로, 병든 자가 건강한 사람으로, 환난당한 자가 축복으로 할렐루야!!
2. 신앙인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이 신앙을 도식화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만의 틀을 가지고 이것은 이거다 저것은 저거다 하면서 기계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 문제 중 일부만 해결 할뿐입니다. 중요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똑똑한 것 같지만 잘하는 것 같지만 자기 틀 안에서 보이는 것만 보고 움직이기 때문에 일부만 해결 할뿐입니다. 묻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많을까요 그렇습니다.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하나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니 계시기는 해도 이것은 기고 저것은 아니고 내 안에서 내가 하나님 되어 교통정리를 다 하지 않습니까? 이것을 도식이라 합니다. 그 도식이 인생의 몇 퍼센트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힘으로 하지 못한 그 어떤 것들은 속수무책이지 않습니까? 신앙이란 어찌 보면 “덮어주고”“품어주고”“위로하는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아름답다고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잘못한 자녀들에게도 관대하지 않습니까?
3. 지식은 사람의 일부분을 변화시킬 뿐 그의 본질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질을 변화 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입니다.” 여러분! 힘들고, 두려워, 무너졌습니까? 아버지 앞에 나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란 주님의 사랑을 받으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나를 품어주십니다. 그리고 격려해 주십니다. 너는 내 자녀야, 그러므로 너는 어떤 조건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격려를 들으면 마음이 바뀌어서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바꾸신 마음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새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목표가 보여야 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탕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낙심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눈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날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도 앞만 보고 도식화 된 자기 생각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속히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합니다. 그 긍휼하신 거룩한 아름다운 사랑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아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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