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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요19:23-30 +
예수님의 십자가 요19:23-30 +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때부터 숨을 거두시기 전까지 있었던 일 두 가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진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도록 부탁하신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로마의 형벌로서의 채찍질에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푸스티가치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교적 가벼운 죄를 범했을 때 엄한 경고와 함께 가하는 채찍질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요18:33“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으며 일차로 심문한 빌라도가 요18:38에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하고서도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그들의 반감을 누그러뜨려 예수님을 방면하기 위해서 그를 데려다가 채찍질하게 했을 때의 채찍질은 이 푸스티가치오였을 것입니다.
둘째는 플라젤라치오 입니다. 이것은 보다 중죄인이게 행하는 채찍질입니다.
셋째가 베르베라치오 라는 채찍질입니다. 이것은 십자가 같은 다른 형벌에 처할 자들에게 가해지는 채찍질입니다. 어차피 죽을 몸이기 때문에 아주 혹독하게 가하는 채찍질입니다. 이 채찍질을 받는 사람은 벌거벗겨지고 기둥에 그 몸이 고정된 상태에서 여러 병사가 지칠 때까지 혹은 지휘관이 그치라 할 때까지 번갈아 계속해서 맞습니다.
그때 사용되는 채찍의 끄트머리에는 뼛조각이나 납덩어리나 기타 금속이 달려있습니다. 채찍질이 가해질 때마다 이 단단한 물질들이 몸에 들어가 박히고 채찍을 잡아당길 때마다 살점이 뜯겨져 나옵니다. 이 채찍질이 끝나면 죄수의 몸은 여기저기 뼈가 드러나고 창자가 튀어나오기까지 합니다. “질그릇 조각 같이 되고 죽음의 진토 속에서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다는” 말은 그 상황에 딱 들어맞는 표현일 것입니다. 요한은 바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약성경에 이미 주어진 예언대로 되어가는 일임을 목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사람이 이런 치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요한은 이것이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일이며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그 예언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인류구원사역이라고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2. 십자가에 달리실 때부터 숨을 거두실 때 사이에 있었던 두 번째 일을 생각해봅니다.
25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네 명의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 세 명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지만 마리아인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또 한 명의 여인은 예수님의 이모라고 합니다. 즉 어머니 마리아의 여동생입니다.
이 여인은 살로메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세배대의 두 아들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쨌든 그렇다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이종사촌형제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서들이 전하는 몇 가지 사실의 이해를 한층 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즉 예수님의 이모님이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와서 청하기를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했던 것도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에게는 요한을 가리키시며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는 당신의 어머니를 가리키시며 “보라. 네 어머니라.” 그러나 그 의미는 요한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당신 사후에 당신 대신 보살펴달라는 당부 합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외에도 다른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친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맡기지 않으시고 요한에게 부탁하셨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그때까지는 아직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는 요7:5“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의 기록과 그 형제들은 예수님의 처형 때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었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예수님 십자가 곁에는 그렇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서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주위에 모여 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한쪽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믿지도 않으며 예수님 때문에 일거리를 갖게 되었고 거기서 어떤 이득을 취하는 일에만 혈안이 된 자들입니다.
다른 한쪽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은 못하고 조용히 탄식하고 있지만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억누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지막 말씀까지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어디에 속해 있는지 진지하게 묻고 똑바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그 십자가 그늘 아래 머물며 어떤 이득이나 챙기려고 제비뽑기 하고 있는 자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명예를 얻기 바라고 세도 부리고 싶어 하고 세상에서 누리는 권력을 교회 안에서도 누리려 하는 것은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곁에서 옷 나누며 제비뽑는 로마 병정들의 일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자존심이나 명예심이나 악감정이나 복수심 같은 것도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걸린 십자가는 은혜의 십자가가 아니라 저주의 십자가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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