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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은 능력입니다 빌1:1-8 +
기쁨은 능력입니다 빌1:1-8 +
우리는 "그리스도인(Christian)"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법에 따라서 세상과 어울려 살다 보니 우리는 수많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믿음이 병든 증거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뻐해야 하면 하나님을 기뻐해야 하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께 그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합니다. 동일한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흐를 때도 있고 슬픔의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동일한 마음의 샘에서 슬픔이 솟구치기도 하고 기쁨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이 슬픔과 기쁨이 함께 만나는 교차로가 바로 인생입니다. 감기처럼 찾아오는 낙심, 고뇌, 근심, 좌절, 침체, 그리고 우울한 마음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배움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첫째. 환경이 기쁨을 빼앗은 장애물입니다. 인간은 살아가는 환경에 의해서 좌우 됩니다. 좋은 환경을 만나면 기뻐하고, 상황이 변하면 우울해지고, 사도 바울이 처해있는 환경은 감옥입니다. 우울해 질 수밖에 없고 기쁨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그 환경을 초월하는 기쁨의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어떻게 초월했을까요?
환경을 뛰어넘어 예수님 안에 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임을 사도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예수님 안에는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 빌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경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깨닫고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빌4:11-12)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이 여러분의 모든 환경가운데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사람이 기쁨을 빼앗는 장애물입니다. 사람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하는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환경보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남편이, 아내가, 자녀가, 직장동료가, 이웃이, 교우가 기쁨을 빼앗아 가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다짐하는 40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그가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에게는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관계를 초월해 기뻐하는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를 초월해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는 것입니다. 사람은 우리가 사랑해야할 대상이지 변화시켜야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마음을 주장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사람 때문에 괴롭다면 그를 사랑하십시오. 말이 안 되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자유 함을 얻어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셋째. 염려가 기쁨을 빼앗는 장애물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가장 큰 적은 염려입니다. 가장 많이 팔리는 약이 신경안정제입니다. 어느 시대보다 잘살고 편안함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염려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염려는 마음이 “나누이다”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또 목을 조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키고 우리를 괴롭게 하는 괴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토록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염려를 극복하는 비결을 배우기전에 여러분에게 부탁드립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 염려는 선택입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염려하고 안 하고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염려 대신에 기도 하십시오 감옥에 갇혀서도 기도하니 기쁨에 비결의 일체를 배운 사도바울에게는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기억력이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상상력입니다. 오늘의 현실과 상황에 메이지 마시고 여러분의 미래를 밝게 설계하십시오.
넷째. 물질이 기쁨을 빼앗는 장애물입니다. 가난을 통과해 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이 주는 경제적인 압박감을 잘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힘들거나 파산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경제적인 압박은 마음속에 있는 기쁨들을 다 내쫓아 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압박감 때문에 기쁨을 상실합니다. 그것은 생존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물질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빌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물질을 초월해서 기뻐하는 비결은 저절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하는 것이고 훈련의 문제입니다. 노력만 한다고 됩디까?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얼마든지 구조신호인 SOS 즉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바울 통해 배우는 물질을 초월해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이것입니다. 즉 진정한 부요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바울은 삶을 통해 예수님이 부요의 원천이요 풍부의 원천이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충만이, 모든 풍요가, 모든 부요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예수 안에 있는 바울은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금과 은이 없어도 예수님을 모셨다면 그 사람이 참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모든 환경에 적용함으로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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