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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15:3-14 +
어찌하여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전15:3-14 +
우리가 사도행전 17장에 보시면 바울이 아테네에 갔을 때 희랍의 가장 대표적인 도시 아테네에서 철학자들을 만나서 논쟁을 벌입니다. 그리고 아래오바고라는 언덕에 올라가서 유명한 설교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바울이 아테네에서 만났든 두 가지 종류의 철학자들에 관해서 행전17:18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바울이 어떤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습니까? 에피큐로스와 또 하나는 스토아 당시 아테네 아주 유명한 철학에 두 흐름 중에 하나였습니다. 소위 에피큐로스은 쾌락 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쾌락주의자들, 일종의 유물론자들이였고, 영적인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유명한 에피큐로스의 그 명언 가운데 하나로 이런 말이 있어요. 죽음에 대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괴변으로 사람들에게 설득했는데 어떻게 말했느냐 하면, 여러분 우리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우리가 살아있을 때 죽음은 오지 않았고 죽었을 때 이미 죽음은 나에게서 떠나간 것이니까 걱정하지 마십시다.”그들은 따라서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즐기자! 즐기자. 인생을 엔죠이 하자, 쾌락주의의 사상이였습니다.
또 하나는 스토익 이라는 학파가 있었습니다. 스토아은 에피큐로스와 정반대의 일종의 금욕주의적인 철학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진지하게 죽음을 사색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정의하기를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신에게 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신에게 연합 되어서 신에 일부가 되어버리고 우리가 신의 품안에 안겨버린다. 여기서 중요문제는 뭐냐 하면 개인적인 존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내가 개인이 어떻게 되느냐, 우리 모두가 그냥 신에게 연합해 버린다는 매우 희미한, 안개 같은 사상 속에서 어떤 죽음이후의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아무런 소망을 스토익 학파들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든 것입니다. 그 당시 희랍을 지배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철학적 사상은 이원론적인 철학 이였습니다. 이원론 이란 것은 뭐냐 하면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를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죽은 다음에 그 영혼은 영원히 살아있다. 소위 육체가 없는 불멸설을 주장 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사상이 아닙니다.
1. 우리도 영혼 불멸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영혼 불멸은 육체가 없는 영혼 불멸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부활의 몸을 가진 영혼의 불멸을 믿습니다. 기독교는 육체를 무시하지 않고 육체를 소중히 여깁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육체 비록 이 땅에서는 병들고, 아우성치고, 배고프다고 그리고, 언제 끝나나, 아우성이지만 육체는 여전히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육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육체를 성령이 거하는 몸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으로서 육체는 포기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주께서는 부활의 몸을 약속합니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그러나 소위 이원론적인 희랍의 철학자는 영혼의 말을 높여놓고 육체는 온전히 무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죽음과 함께, 죽음 저 건너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거에요. 기댈 것도, 바라볼 곳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희랍 그리스 사람들은 그 당시에 죽음 저 건너편, 무덤건너편에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유명한 아래오바고 설교의 절정이 뭐냐 하면 복음에 대한 프리젠테이션, 복음의 전달 이였고, 복음 전달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부활 하신 사건이었습니다.
2. 부활의 사실은 수많은 증인들을 갖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보았다. 열두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도 예수님 사랑하고 사모하다가 그냥 허깨비 환상을 보고 예수님 부활했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뭐 한 두 사람 환상을 본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 500명의 형제들이 한꺼번에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500명이 다 환상을 보았습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바울은 충분한 증인을 갖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허다한 증인들을 우리는 소유한다. 부활은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은 본질적 사건이다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의 탄생은 죽기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부활로, 그가 이 땅에 오신 사건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부활 때문에 오늘우리는 우리의 주님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그 주님이 여전히 내 안에 우리가운데 살아계신 주님이신 것을 고백하는 줄로 믿습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거짓을 사실처럼 착각하고 믿는 것이 미신입니다. 분명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안 믿는 것이 불신입니다. 신앙은 사실대로를 사실대로 믿는 것 입니다. 고전15:23절의 약속 다같이 보시겠습니다.“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부활의 순서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불완전한 일을 많이 경험해도 갈등과 상처와 번민과 시련을 경험해도 그 어느 날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경험하며 온전한 사랑을 나누게 될 것이다. 내일의 완전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세계를 우리가 약속 받고 이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은 좀 괴로워도 지금은 좀 아파도 우리가 힘 있게 살 수 있는 근거가 있잖아요. 우리 다함께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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