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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막3:1-6 +
이웃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막3:1-6 +
오늘 본문에는 이런 대조적인 두 가지의 선택의 사례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어느 것을 선택하겠느냐, 어느 것이 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느냐? 이것 이 주님의 질문이셨습니다.
저는 먼저 생명을 죽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본문의 6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그들은 예수를 죽이고자 결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래 이 바리새인들은 구약과 신약시대의 중간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 400년 동안의 중간 시대에 민족을 보호하고 자기 나라를 외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종교적 전통과 하나님의 율법, 모세의 율법, 토라, 그 율법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서 일어났던 사람들 소위 하시딤이라고 불리워졌던 경건한 사람들의 후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좋은 사람들, 훌륭한 사람들이 어느 날 잘못된 발상, 잘못된 의식구조를 그들의 생각 안에 수용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그들은 사람을, 이웃을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죽이는 사람들로 변신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저도 어느 날 잘못된 우리의 의식구조를 우리 안에 갖기 시작할 때 이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웃들을 죽이는 살인의 행렬에 우리도 가담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이 경고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시딤이라고 불리워졌던 경건한 사람들의 후예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두 가지 이 유를 본문에서 발견할 수 가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시면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저희들의 마음이 완악했다. 본래 이 '완악하다'란 단어의 뜻이 자기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인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본질적인 부패성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이것 때문에 살 맛 나지 않고 직장에 가도, 가정에 와도 우리의 삶이, 환경이 불유쾌한 그러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장 사소한 일에서부터 우리가 이웃들을 헤아린다. 이것이 우리 안에 깨어나 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변화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한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그런 바이러스 같은 무서운 이기심이 여러분 교회 안에도 이런 마음의 완악함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런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살인자로 내 몰고 있었던
또 하나의 원인은 독단적 신앙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단주의 소위 다그머티점(dogmatism) 이라는 것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특별한 신앙체험을 했어요. 신앙 체험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다 신앙체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내 신앙체험을 절대화시키는, 모든 사람이 다 나와 똑같이 체험을 해야 돼요. 자기 체험을 절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혹은 나에게 편리한 어떤 종교의식, 자기가 좋아하는, 선호하는 종교의식을 절대화 시키는 것,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복음이외에는 아무 것도 절대화될 수가 없습니다. 이단들이 하는 것이죠. 그런데 체험을 절대화한다든지, 종교의식을 절대화한다든지, 혹은 기독교의 많은 교리적 강조점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어떤 부분을, 절대화시킬 때, 그 때 우리는 독단주의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독단주의를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케이스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금식에 대한 생각,
둘째는 그들의 안식일에 대한 사고가 바리새인의 독단주의를 대표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금식에 대한 생각입니다. 막2:18절입니다.“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금식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배경은 세리 마태가 주님 앞에 돌아와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은 너무 기뻐 마태의 집에서 잔치를 여셨습니다.(막2:15)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거는 거예요.
우리들도 금식하고 요한의 제자들도 금식을 하는데 어째서 당신들은 먹고만 있습니까? 여러분 금식은 필요한 겁니다. 좋은 겁니다. 저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금식의 좋은 교훈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었으면 죽었지 금식은 못하겠다. 하더군요. 다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금식도 해봐야 돼요. 그 시간을 아껴가며 기도에 몰두하는 것, 이것도 좀 해보셔야 해요.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느냐면 자기의 금식을 절대화 시켜서 금식 하지 않는 이웃들을 정죄하기 시작 할 때 그때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종교적 금식은 1년에 한차례 하는 것입니다. 1년에 한차례 속죄제 일에 그들은 금식을 했습니다. 물론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언제고 금식하기도 했습니다마는 종교적인 규례로서의 금식은 1년에 한 번씩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년에 한번만 해서야 되겠느냐 한 달에 한번은 해야지, 그 다음에 일주일에 한번은 하자.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1주일에 한번 가지고 되겠느냐 경건한 사람들은 일주일에 두 번은 해야지. 예수님은 금식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금식은 좋은 것이다.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금식의 때가 아니란 말이죠.
지금 마태가 돌아왔습니다. 죄인 마태가 회개하고 돌아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축제의 시간, 지금은 잔치를 벌려야 할 시간 , 지금은 즐거워야 할 시간 이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에 와서 금식 왜 안 하느냐고 시비를 건단 말이죠. 이것이 독단주의입니다. 다음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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