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두 번째로 안식일의 케이스입니다. 막2:23절을 보세요. 같이 읽겠습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안식일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삭 잘라 먹은 거예요. 그러면 '참 그 동안 시장하셨던 가보죠?'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반응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그다음 절 막2:24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겨우 하는 소리가 안식 날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하고 시비 걸었습니다. 성경보시겠습니다. 막2:27-28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왜 주었느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안식일이 우리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그렇게 말씀하는데 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한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몇 개나 만들었느냐? 39개를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39개 계명. 거기다가 계명마다 다시 세칙 여섯 개씩. 서른아홉 개 곱하기 여섯 234개 얼마나 많습니까?.그러니까 거룩하게 보네야 할 안식일에 조금만 잘 못하면 이것 무엇에 걸리나 안 걸리나 서로가 감시하니 안식일을 거룩하게 기쁘게 즐겁게 보네기는 커녕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됩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우리의 안식, 우리의 휴식, 우리의 새로운 창조,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셨건만 이것을 지키냐, 안 지키느냐 그것 가지고 사람을 얽어매고 있었습니다. 이제 안식일은 축복이 아니고 무거운 종교적 부담이 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 가지고 사람들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또 마가복음 2장에 나타 난 바리새인들의 언어, 그들의 날카로운 말, 사람들을 파헤치고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들을 찌르고 있었던 그들의 부정적 언어의 정체를 헤아려 보십시오.막2: 16절에 보시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평범하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뭐라고 말했습니까?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십니까?' 그들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죄인인가 바리세인들은 하나님의 일까지 간섭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돌아봐야 합니다. 혹이 하나님의 사역을, 성령을 훼방하고 있지 않는지 성령훼방은 다시는 구원 받지 못한다고 성경은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입니다.
'보시오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말입니다. 그들 은 이 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상처주고. 정죄했습니까?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이런 독단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시 돋친 언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언어로 우리가 이웃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이웃들을 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언어 조심해야 됩니다. 오죽하면 시편기자가 '하나님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소서' 하였겠습니까?
지혜로운 말, 선한 말, 아름다운 말, 이웃을 세우고, 이웃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말 대신에 우리가 생각지 않은 말, 종교적인 독설로 우리가 이웃들에게 상처 준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말로 우리는 이웃들을 죽이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를 해보십시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들. 누구였습니까? 대표적인 사람. 예수님이시죠. 본문에 어떻게 시작이 됩니까? 마가복음 3장 1절에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안식일이었을 것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이었을 것입니다. 다 시 회당에 들어가신 그날.
그냥 가서 예배만 드린 것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 가운데 손 마른 사람. 예수님은 그를 보셨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그 말할 수 없는 그 불쌍히 여기는 심정과 그 특유의 자비를 가지고 손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손을 쓸 수가 없는 사람. 본문을 해석하는 어떤 유대인 고전에 보니까 이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전설일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이 돌을 깎아서 일하는 석수장이였답니다. 그가 손이 말랐다. 이건 치명적인 일입니다. 더 이상 직업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폐인이다. 이제. 얼마나 이 사람이 인생에 대한 좌절과 낙망에 빠졌겠어요? 주께서 이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봤습니까?
본문 3:2을 보시겠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이사람 고치나 안 고치나 보자.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관심 이였습니다. 그들의 함정일수도 있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 내가 어떻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을까?
이런 자비가 긍휼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적 사고가 없었습니다. 복음적 의식구조가 없습니다.여러분 놀라운 사실은 복음을 받아들인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 안에도 복음적 사고나 복음적 생활양식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살리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중요시 여겨야 합니다.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를 진지하게 모색하는 삶의 태도. 두 가집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특별히 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 구약학자는 구약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구약성경을 계속 읽고 있다 보니까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구약의 하나님은 편견을 갖고 계시다. 편애하신다. 누구를 편견 하시는가. 구약을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고아, 과부, 나그네, 하나님은 이들을 편애 하신다. 약한 사람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소중이 여길 때부터 우리의 복음적 삶의 모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안식일 범한 자여" 그 오해를 받으면 서도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이 한사람을 향한 진지한 예수님의 사랑. 아니 그를 사랑하기 위해 마지막에 예수님은 십자가까지 가신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죽이고 이웃을 살렸던 예수님. 이런 마음. 이런 태도로 우리는 이웃들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을까요? 저와 여러분은 우리는 이웃을 죽이는 자들일까요. 살리는 자들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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