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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2-7 +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2-7 +
우리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법에 따라서 세상과 어울려 살다 보니 우리는 수많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에 소원을 이루려면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이 없다면 믿음이 병든 증거입니다 성경은 기뻐하라는 말이 191번 나옵니다 잠언 17:22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뻐하는 자체가 양약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뻐해야 하면 1)하나님을 기뻐해야 하고, 2)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3)하나님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께 그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은 동일한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흐를 때도 있고 슬픔의 눈물이 흐를 때도 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똑같은 눈에서 슬픔과 기쁨이 함께 만납니다. 동일한 마음의 샘에서 슬픔이 솟구치기도 하고 기쁨이 솟구치기도 합니다. 이 슬픔과 기쁨이 함께 만나는 교차로가 바로 인생입니다. 기쁨의 영성은 예수님의 영성이요 기쁨은 성령의 열매이며 천국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1. 우리는 인간의 실존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우울할 수 있습니다. 괴로울 수 있습니다. 말은 하지 않지만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엘리야를 보십시오. 이세벨의 공격을 받고 지쳐 쓰러졌을 때 그는 죽고 싶어 습니다. 한때 바알의 선지자450인과 아세라400인 즉 이방선지자와850:1로 영적 전투를 벌일 때는 그토록 강했던 그가 로뎀나무 아래 쓰러졌습니다. 그 불의 선지자의 고백을 보시겠습니다. 왕상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여기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슬픈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고통스런 마음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 괴로움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의 울부짖음 하나님의 대안은 바로 모세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남유다가 멸망받기전 마지막 대안은 예레미야였습니다. 세례요한, 사도 바울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사명은 사는 동안에 끝이 있는 게 아니라 사명이 있는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품고 사는 게 사명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의 임재가 있으면 우리는 이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2. 지금 이 시대를 어려운 시대라고 말합니다. 혼돈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가 대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 시대처럼 바로와 싸우지 않습니다, 사사 시대와 같은 때도 아닙니다. 예레미아 시대도 아닙니다. 그러나 예배의 대 혁신 예배의 출애굽이 반드시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중세 때 목숨 걸고 종교개혁을 했던 루터의 시대도 아닙니다. 카다쿰에서 숨어 성찬하며 예배드리는 시대도 아닙니다.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예배의 부흥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바알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자 7천을 남겨 두신 것처럼 이 시대 예배의 부흥을 위해서 우리를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본문 2-3절을보시겠습니다.“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세상에 나가면 악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를 학대할 수도 있고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면 여러분의 가정이. 섬기는 교회가, 이 나라가, 왕성해 집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종들 가운데는 원만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야곱은 편애하는 아버지 밑에서 양육 받았고 요셉은 자신을 시기하고 음해하려는 형제들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형제자매 가운데도 아픔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원망스런 아버지, 미운 형제, 야속한 어머니, 이런 환경 속에서는 모든 사람이 당연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 상황을 이기고 일러 날 수 있습니다. 그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3. 우리의 하나님은 언약 의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그를 죽이려는 형들의 음모로 구덩이에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노예 상인에게 팔려서 노예가 됩니다. 그러다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탓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감옥에 갇혀 노예보다 더 깊은 밑바닥 인생으로 전략합니다. 요셉은 17세부터 30세까지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13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요? 요셉이 그 구렁텅이와 노예 감옥에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는 자기 위치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자기 위치에 맞추지 않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는 그 절망의 늪에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요셉의 말로 남을 위로를 잘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은 어려움과 고난에 처하면 자신의 비참한 위치에 초점을 맞춥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내용도 현실에서 건져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보면 간절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위치 변화에 대한 기도뿐입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위치 변화의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위치보다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 언약의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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