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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8:52~59 +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8:52~59 +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기독교)는 유일신이시며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을 주관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종교는 삶과 유리된 의식종교였습니다. 즉 의식만 행하면 된다. 제의 제사를 행하는 의식 자체가 종교입니다. 그래서 인신제사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삶 전체와 관련된 것이었고, 종교의식 외에도 하나님 이해에 기초한 윤리적 삶을 중시했습니다. 정리하면 기독교는 여러 종교 중의 또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참된 종교입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종교는 다신교였고, 이 신을 섬기면서도 동시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있습니다. 동시에 여러 신들을 섬겨도 내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신들은 각기 다른 기능을 행사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태양신,바다신,바람신,등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와는 달리 유일하고 참된 종교이기에 다른 종교와 섞이지 않는 배타적인면도 있습니다.
1. 불교의 중심 사상은 일승사상
우리민족과 가까이 있었던 불교는 대승불교의 중심 사상은 일승사상이며. 일불승(一佛乘) 사상이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하면‘우리가 바로 부처다’라는 것입니다. 수행과 명상을 통해서 성불 즉 나도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타력 종교와 자력 종교는 외상 매우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를 가리켜. 우리는 자력 종교라 합니다. 철저하게 자기 능력으로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부처가 되어 자신을 구원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란? 스스로 깨달은‘자’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철 스님께서는.1986년 불탄일(석가모니생일) 법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술집에서 웃음을 파는 엄숙한 부처님들. 오늘은 당신네의 생신이니 축하합니다. 비록 교도소에 있는 흉악범. 술과 몸을 파는 창녀일지언정. 그들 속에서도 역시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 즉 능력이 있음을 일깨워 주기 위해 그들을 거룩한 부처. 엄숙한 부차라 불렀던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교회는 목사라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그 누군가의 즉 구원자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이것을 믿는 종교를 타력 종교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철저한 타력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없이는 구원을 얻을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음을 믿는 까닭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타력 종교와 자력종교는 외관상 매우 흡사합니다. 그러나 핵심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자신을 위한구원자가 누구냐의 차이입니다. 즉자기 자신이냐? 아니면 자기 이외 존재이냐 것입니다. 이미 보도된 것처럼 성철 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직전에 남기신 열반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제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려도다.”(조선일보 1993.11.5.15면.동아일보 1993.11.5. 31면. 경향신문 1993. 11.5 9면. 중앙일보 1993.11 5 23면 자료)
2. 성철스님은 출가하기 전 출생한 딸이 있는데 그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한 인간의 구원이란 관점에서는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처럼 철저한 구도의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당신의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릇된 삶에 대한 한을 지울 수도 없음을 그분의 열반송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자력종교에 한계요 타력 종교와의 본질적 차이점입니다.
3. 그러나 타력 종교라 말하는 기독교는 이에 반하여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디모데후서 4:6-8 보시겠습니다.“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할렐루야! 얼마나평온하고 평화가 넘침니까.
사도 바울이 위대한 사도였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는 확실히 신약 속에 영웅입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속에 왜 거짓이 없었겠으며? 왜 탐욕과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미웠으면 이렇게 탄식했겠습니까? 로마서7:24 절입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듯 살아생전 탄식하던 바울이 어찌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토록 당당한 유언을 남길 수 있었겠습니까? 달려야 할 길을 마치고 믿음으로 지켰으니 이제 이 세상을 떠나면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를 받을 것이라 어찌 이렇듯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의 신을 믿은 것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비록 죽음의 문턱에 섰을망정 죄의 결과를 무서워할 것도, 죽음 이후에 두려워할 것도, 그 무엇을 탄식할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나의 죄를 씻어 주시고 의롭다 하시며 사랑하시는 주님을 온 마음 다하여 찬양할 뿐입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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