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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일에 충성한자. 마25:14-23 +
적은 일에 충성한자. 마25:14-23 +
다시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그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오늘 이 하루하루의 삶은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야 할 우리의 삶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을 어떻게 사십니까? 매우 중요 한 것이죠.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인이 종들에게 맡기듯 저와 여러분들 에게 우리 주님은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무얼 맡기셨습니까? 시간도 맡겨 주시고, 돈도 맡겨 주시고, 재능도 맡겨 주시고, 은사도 맡겨 주시고, 또 우리의 몸도 맡겨 주시고, 우리의 목숨, 인생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맡겨 주신 시간을 어떻게 사용 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중요한 것처럼. 내가 돈이 얼마나 많으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맡겨진 돈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재능과 달란트를 갖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달란트, 탁월한 재능을 갖고도 별로 볼품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아주 적은 재능을 갖고도 그것을 아주 유익하게 이웃들에게 기쁨을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맡겨진 것을 관리한 후에 마지막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들은 모두 둘 중에 하나로 결정될 것입니다.
1. 하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할까요? 우리 인생이 결산되는 그날 착하고 성실한 종, 충성된 종으로 결산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의식이 있다면 맡은 자의 의식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의식 속에서 이 맡은 자의 의식, 청지기의 의식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시간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정말 충성된 종으로 한 평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두 번째로 중요한 의식은 신뢰의식입니다. 신뢰는 믿음을 말합니다.
이 믿음직스럽다는 말은 철저하게 우리의 내적인 성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실성, 겉으로 드러난 어떤 모습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간직 되어 있는 내적인 성실성,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진 중요한 단어입니다.
여러분 외공과 내공은 다릅니다. 겉으로 아무리 좋아보여도 내적인 믿음이 없으면 금방표가 나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 성실한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들의 성실의 문제는 내가 성실한 사람이 되자 라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게 있어서는 우리는 성실한 하나님을 우리가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2.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그 하나님이 성실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32장4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 을 향해서 고백하기를 하나님 당신은 진실무망하십니다. 당신은 성실 하십니다라고 고백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그 성실하신 하나님은 역사와 우주를 성실하게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에게 성실한 미션을 주셨습니다. 믿는 자들은 거기서부터 우리의 성실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내 인생을 걸고 성실을 향해서 나의 존재를 만들어 갈 수가 있는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한 달란트 받았던 종, 유일하게 칭찬 받지 못하고 책망을 받았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경우에는 이 주인관이 왜곡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생각이 잘못 되어 있었습니다. 성실한 가치가 없다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불성실하게 살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문제가 어디 있느냐? 자기에게 그것을 맡겨 주신 주인을 믿지 못했습니다. 주인을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25:24절을 보겠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주인을 향해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번역하면 당신은 인색한 사람입니다. 주인보고 인색하다고 그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혹은 두 달란트를 주면서 나에게만은 왜 한 달란트 밖에 주지 않았느냐. 당신은 나에게만 짜고 인색한 분이군요. 아마 이런 의미가 숨어있을 것입니다.
3. 한 달란트란 것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금 한 달란트면 적게 쳐도 4억7천 지금 시세로 하면 약27억1천 한 달란트는 약33Kg 1g당 8만6천 1K당 86.000.000원 약28억4천만 원 두달란트면 56억8천만 적어요? 많아요? 감동이 안 됩니까, 아 그래도 나에게도 이렇게 많이 맡겨 주셨구나. 고맙구나. 내가 이것을 제대로 잘 관리해야 되겠구나 생각하고 감사하는 대신에 아니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왜 나에게만 한 달란트를. 왜 이런 불평을 가 졌을까요?
비교하니까 그래요. 이 비교라는 것이 항상 인생을 비참 하게 만들죠. 비교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아주 복잡해집니다. 저는 이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만약 비교했다면 불평할 수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있죠. 왜?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이 어떻게 불평 할 수가 있습니까? 왜 나에게만 두 달란트 저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이 세상에는 항상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존재하죠. 그러면 항상 난 비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초점을 거기다 맞추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맡겨 주셨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내가 이만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맡기셨겠지. 만약 그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의 주어진 인생의 미션 앞에 성실했더라면 결과가 어땠을까요? 이게 바로 신뢰하는 의식 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식. 그리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나의 삶에 대한 가능성을 또한 신뢰하는 믿음. 여기서부터 우리의 성실성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이 신뢰하는 의식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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