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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루었다. 요19:23∼30 +
다 이루었다. 요19:23∼30 +
성경을 볼 때에도 연역적으로 접근하는 방법과 귀납법적으로 다가서는 방법이 있습니다. 두 방법 모두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지만, 연역적으로만 성경을 보면 은혜로울 수는 있으나 성경 속의 사실을 내 삶에 적용시키기 어려운 단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주저없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 참으로 은혜로운 논리 전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내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믿음의 조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아닌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고로 나는 아브라함처럼 내 자식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도 바울에 대해서도 연역적으로 접근해 보십시다. `바울은 가장 위대한 사도였다.' `위대한 사도는 날아오는 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고로 그는 주님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바울과 비교한 우리 자신은 어떻게 표현되겠습니까? `나는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가 아니다.' `위대한 사도가 아닌 나는 이유없이 내게 돌팔매질을 하는 자를 용납할 수 없다.' `고로 지금 내가 진리 때문에 순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을 이처럼 연역적으로만 접근할 때,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과 엄청난 거리감을 느끼면서 결단보다는 오히려 주눅이 들고 자포자기 하기가 더 쉽습니다.
1. 그러나 똑같은 인물에 대하여 귀납적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전혀 다른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이 가장 큰 재산이던 그 옛날 100살이 될 때까지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믿지 못해, 여종과 동침하여 서자를 먼저 얻는 믿음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고 보니 기근의 땅이자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도망 가버린, 신앙의 지조라고는 전혀 없는 한심한 인간이었습니다. 애굽에서는 자기 아내를 탐내는 사람들로 인해 목숨을 잃을까 아내를 누이라 속여 왕에게 주는 정말 창피스러운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인간 같잖은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치 않으시고 말할 수 없는 자비와 긍휼로 그를 붙드시고 바로 세워 주셨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인격적으로 깨달았을 때, 자신을 위해 인내하시며 끊임없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았을 때,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바뀌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과 사랑과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자식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자식을 더 확실하게 얻었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 높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의 삶을 귀납적으로 들여다보면 우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믿음도 신앙의 지조도 없고, 정말 창피하고 한심한 삶을 살아 왔다 할지라도, 아니 참담한 실패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는, 우리도 모두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이 얼마든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진리인 주님을 부정하던 인간이었습니다. 자기와 반대 의사를 가진 자를 돌로 쳐죽일 정도로 독불장군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잘났고 자기만 옳다고 착각하던 철부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처럼 형편없던 인간인 그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살리시기 위해 피 흘리시며 돌아 가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에 의해 그는 새롭게 변화되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날아오는 돌맹이도 기꺼이 맞을 수 있었고, 그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참수형마저도 두려워 않았습니다. 주님 사람의 종착역은 부활이요, 영원한 생명임을 알았던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또 다시 소망이 용솟음치게 됩니다. 우리가 젊은 시절의 바울 같은 독불장군이요 철부지 같은 인간이요, 심지어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 할지라도 주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주님의 사랑 속에만 있으면, 주님에 의해 우리 역시 얼마든지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3. 이것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연역법적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같은 신이시다.' `고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넉넉히 지실 수 있었다.'이렇게 될 경우 우리는 예수님을 닮을 수도 없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질 가능성은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입니다. 하찮은 인간이 어찌 신을 닮을 수 있으며 신이나 지는 십자가를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귀납적으로 다가설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예수님 역시 여인의 몸을 통해 육신을 입고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 분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목수 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궁핍함 속에서도 그 분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만을 구하며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한 말씀도 빠짐없이 그 분의 삶 속에 성취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고 좇아 갈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이 비로소 확보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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