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칼럼
현재 위치 : 커뮤니티 > 목회칼럼
우리와 다른 하나님. 렘29:10∼16 +
우리와 다른 하나님. 렘29:10∼16 +
오늘의 본문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요시아 왕 13년(B.C.627)에 활동을 시작하여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B.C. 587년 이후 얼마동안까지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불의와 죄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렸던 눈물의 예언자였습니다. 유다왕 여호야긴 때 바벨론으로 잡혀간 유다인은 왕족, 선지자. 일반 민중을 포함해서 약 3,000명이었습니다. 이때가 이스라엘의 가장 절망적인 어두운 역사의 시기였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비애에 찬 애가를 지어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은 무능력하신 분이라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역사의 시기에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과는 전연 다른 희망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29장 전반의 내용이 예레미야의 편지입니다.
1. 예레미야가 본 희망적인 하나님의 계획
예레미야가 본 하나님의 계획은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이 차면 그들을 본국으로 귀환시킬 것과 그들을 통해 미래의 역사에서 전 인류를 구원할 구속의 역사였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본문11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이스라엘이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재앙을 준비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평안과 소망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로 그 포로의 시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린 때가 아니요, 가장 가까이 계신 때라는 것을 알고, 그때 오히려 하나님께 부르짖고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있는 평안과 소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없이 그들 수준에서 만들어 놓은 삶에서 경험해 온 평안과 소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불행과 재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평안과 소망은 십자가의 형벌 다음에 부활의 때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안과 소망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시기는 십자가의 심판의 의미를(예표)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때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고 구속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바로 그 하나님의 시간을 파악했습니다.
2. 70년이란 역사의 시간
본문에는 70년이란 역사의 시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역사의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밝아오는 평안과 소망의 시간의 전주곡과 같은 의미를 지닌 시간입니다. 교회에 통용되는 하나님과 관련된 호칭들 가운데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러한 호칭들은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다는 의미는 외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존재해 가시는 존재방식이 우리의 것과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협잡하거나 타협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권모술수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우리의 설득에 설득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언제나 그 분으로서 계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분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의 신념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공상 세계의 인물로 만들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전연 관련 없이 우리의 신념에 도취되어 행동하기도 하고 공상 세계 가운데서 허황한 꿈을 꾸기도 합니다. 굉장히 흥분과 열기로 일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전연 상관없는 일이 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사상을 충족시켜 주는 분으로, 우리가 계획하고 추진하는 생의 길을 보장해 주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정직하게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사상, 우리의 계획, 우리의 생의 설계가 얼마만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에 가까우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이 하나님과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3. 예언예레미아는 우리와 다른 하나님의 시간을 바르게 파악하였습니다.
교회가 자기 시대에서 예언자적 안목을 상실하지 않고 깨어 있을 때,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이 세상의 평안과 소망 가운데서 먹고 즐길 때 애통하는 자로 살게 되고, 그 반대로 자기 시대 가장 절망적인 역사의 시기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하고, 전심으로 그 분을 찾으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다른 하나님에 의해 마련된 십자가의 심판 다음에 다가오는 평안과 소망의 시간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두운 역사의 시기에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갖게 되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게 됩니다.
그 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거짓으로 우리를 합리화시켜 주거나 우리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고 자기에게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새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거짓 소망, 거짓 평강 가운데 머물게 하며 우리를 합리화시켜 주고 우리의 비위를 맞춰 줍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우상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다른 하나님은 십자가 없이 이루어진 소망과 평안의 삶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합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거짓 소망, 거짓 평안에서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 가운데 있는 평안·소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