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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롬8:31-39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롬8:31-39 +
예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만왕의 왕이 우리를 구원하려 오셨는데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한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주로 보낸 줄로 믿고 믿음으로 영접하면 우리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은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전도를 했습니다. “교회에 나오세요. 예수 믿으세요.” 하니까 “나는 죄가 많아서 못 나간다.”고 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죄보다 큽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죄 사함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은 머릿돌이 되어서 그 집을 지켜주십니다.
벧전2:6-7절에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라고 했습니다. 믿으면 머릿돌입니다. 믿지 않으면 버려지고 맙니다. 이 돌은 아무 의미 없는, 쓸모없는 돌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내 마음에 믿으면 주님은 내 마음에 모퉁이 돌이 되고 우리 가정에 주님을 모시면 우리 가정에 머릿돌이 되십니다. 집을 지을 때 옛날에는 머릿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고 집의 머릿돌이 되어서 그 집을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로마 사람이 예수님을 모시고 그 나라 국가의 머릿돌로 만들어서 2천 년 동안 로마가 세계적인 부요와 머릿돌의 복을 받았습니다. 로마는 예수님을 머릿돌로, 스위스도 예수를 머릿돌로, 영국도 예수를 머릿돌로, 미국도 예수를 머릿돌로 모셔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수를 머릿돌로 할 때에 이 나라에 놀라운 축복이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머릿돌입니다.
2. 믿음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막2:1-12 예수님이 침상에 누인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유명한 기사가 나옵니다. 말씀처럼 중풍으로 누어있는 환자가 있고 그에게 믿음의 네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현대 의학으로도 고치지 못한 이 중풍병자를 그것도 2000년 전 치료하는 놀라운 사건인데 왜 치료가 되었는지 살펴보니 네 명의 친구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치료하십니다. 막2: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달아내린 믿음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 시각입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병이 났을 때. 병을 바라보는 시각, 어떠한 문제가 발생됐을 때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생리적으로 볼 것인가? 병리적으로 볼 것인가? 즉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거나 들리지 않는 상태를 청각장애라 합니다. 또 시력의 상실로 인하여 볼 수 없는 것을 의학적으로 시각장애라 합니다. 이러한 장애 판정은 더 이상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생리적으로 바라보는 것인데 더 구체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은 다시는 들을 수 없고, 지금 볼 수 없는 사람이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생리적이라 합니다. 그래서 생리적인 접근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절망적인 접근입니다. 반면에 병리적인 접근은 그 병이 현재 발전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두 가지 방향으로 다 발전할 수 있습니다. 상태가 더 좋아져 나을 수도 있고 악화되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병리적으로 바라보면 고치려고 하는 것이고, 다시 말해 병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옷만 바꾸어 입어도 사람이 변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직 의인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너는 의인이 되었으니 의롭게 살아라. 그리고 믿고 의인인척 하고 사니 나중에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이 된 것처럼 사는 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말대로 의롭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간단이 말해 칭의는 상태의 변화가 아니라 신분의 변화입니다. 우리는 자칫 우리의 상태가 의로운상태가 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칭의는 더러운 몸에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같습니다. 즉 우리안에는 여전히 죄악이 있고 타락한 본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불러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진짜 의인이 되는 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외형적인 변화가 실제적인 내면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살라는 것입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성경은 긍휼의 옷을 입어라고 말합니다. 그럼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비의 옷을 입어라는 것입니다 그럼 자비로운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겸손의 옷을 입고 온유의 옷을 입고, 오래 참음의 옷을 입어라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으면 그렇게 변화 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교만이 있다면 는 남을 무시하는 것이 있다면 오늘 겸손의 옷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겸손의 옷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듯 낮은 자리에서 일하는 것입니다. 내가 꼭 원해서 하는 일이나 기뻐서 하는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 왜 하는가 바로 겸손의 옷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럼 성화가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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