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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다메섹. 행9:1-9 +
사울의 다메섹. 행9:1-9 +
시118:8-9절을 보면“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9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라고 시편 기자는 자기의 인생을 고백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믿고 자신의 인생을 맡겨 보았더니, 우상에게 맡겨 보았더니 남은 것은 실망이요, 상처투성이요, 속은 것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더니 흔들리지 않은 반석과 같이 그 마음에 완전함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인간에게는 신을 의지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능력이 많다고 생각되는 것에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본능적인 종교의식이나 또는 샤머니즘적인 사고방식으로 급하면 손 비비며 찾는 것과 다릅니다.
1. 주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도 돌아서는 전환점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무슨 문제에 부딪혀 있습니까? 이때가 내가 돌아설 시점 즉 절호의 시간입니다. 이 말은 위기가 축복이요. 기회란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가 똑같다면 누가 교회를 두려워하겠습니까?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일이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일이 다 같다면 교회의 특징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없는 것을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싸우지만 교회는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은 의심하지만 교회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은 자기 것을 챙기지만 교회는 서로의 것을 챙겨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할 수 없는 것 이것을 교회에서 하며, 삶으로 나타난다면 이것이 곧 기적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앙인들 에게는 이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미워하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화해고, 하나님의 달란트을 땅속 깊이 묻어 둔 자가 다시 사용하고, 봉사와 헌신을 내 팽개친 자가 다시 추스르고, 하는 역사가 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도 기적이고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도 기적이지만 깨진 가정이 화해하고 잃었던 믿음이 말씀으로 다시 찾는다면 이것도 기적입니다.
2.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의외로 상처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행여 용서를 말하면 그 대상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먼저 그 대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려 그 대상을 생각하면 용서는커녕 더욱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을 잘 듣고 터닝 돌이키는 시점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먼저 우리 인간의 세상을 보면 온통 상처투성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상처는 멀리 있는 자 모르는 사람이 주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라는 것은 남을 먼저 용서 하는 게 아니라 나를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은 어디에서도 들어 볼 수도 또 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구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생을 산 사람의 하나를 꼽으라면 요셉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17살 때 형제들의 질투와 모함을 받아서 노예로 애굽에 팔려 갑니다. 그로부터 10년후 27살 때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거절하자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갑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끗에 30살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총리가 된 후 구년 그러니까? 39살에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그 형제들이 기근 때문에 먹을 것을 사로 애굽으로와 뜻밖에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요셉의 나이 쉰여섯 살 때 그의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납니다. 야곱이 세상을 떠나자 그 형제들이 불안해 떨기 시작합니다. 혹 요셉이 복수하지 않을까? 그때 요셉이 웁니다. 왜 울었을까요? 이윽고 요셉이 형들을 다음과 같이 위로합니다.“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까?” 내가 당신들의 자녀들까지 맡아서 길러 드리리다. 이 사람이 요셉입니다.
3. 사람을 가장 해치는 자가 누구입니까?
사자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만큼 어렵고 힘든 것이 없습니다. 25시의(작가 게오르규) 요한 모리츠는 소박한 성품의 평범한 농부이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착한 루마니아의 농민이다. 어느 날 그는 이름이 유대인의 이름이며 얼굴이 유대인처럼 생겼다고 징발당하여 유대인 캠프에 수용됩니다. 거기서는 아무도 그를 루마니아 인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어. 할 수 없이 헝가리로 탈출하자, 이번에는 루마니아 인이라는 이유로 심한고문을 당합니다. 그러던 중 헝가리 정부에 의해 독일로 팔려가서 군인이 된 그가 프랑스 포로를 구출하여 미군 진영에 이르자 그들은 처음에는 연합군을 위한 영웅 대접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적성국가의 시민이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가둔다. 그리하여 무려 13년 간이나 수용소에서의 수난의 날들을 살다가. 1백여 군데의 수용소를 거친 후 어느 날 그는 체포되던 때처럼 영문도 모르게 석방됩니다.
그런데 그 13년의 세월은 그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수산나는 예쁘다는 이유로 러시아 군에게 끌려가 하루에도 수십 명에게 노리게 되어 살다가 그만 누군지도 모르는 저주스런 러시아군의 아들을 낳아 기르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는 자녀들과 함께 남편이 살아 돌아올 날만 기다리며 살다가 그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에게 다시는 맞을 수 없다는 글을 씁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이들은 남들이 살아보지 않은 25시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 남편이 돌아와 재회를 하며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기 전에 우리를 용서하자고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이 분노를 용서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들은 억압에 25시가 아닌 그것을 통해 그 시간을 돌이키는 시점으로 용서의 25시 사랑의25시 행복의 25시로 전환점을 삼습니다. 돌이키면 모두게 바뀝니다. 할렐루야!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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