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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한일서 4:7~12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한일서 4:7~12 +
누구나 다 하나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만나기를 위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깊은 명상에 잠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도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어디를 찾아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해 듣고, 보고, 만져 보았다고 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에 대해 들었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해들은 것이 아닙니다. 요한이 의미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해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가 세상을 사랑하시며, 특별히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예수님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외모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의 행동에서 인간과 함께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세상이 창조되었고, 그의 사랑으로 세상의 질서가 유지되고, 그의 사랑으로 모든 생명체가 보존되고 있습니다.
1.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단편 이야기 소설에 천사 미하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하일이라는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알몸으로 세상에 쫓겨났습니다. 미하일이 어긴 하나님의 명령은 쌍둥이 딸을 낳은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어 오라는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미하일은 그 어머니의 영혼을 거두어 가면 가엾은 어린것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미하일 천사를 쫓아내면서 세 가지 과제를 줍니다.
첫째는 인간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 셋째는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사 미하일에게 이 세 가지를 다 깨닫게 될 때 하늘나라에 다시 불러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천사 미하일은 추운 겨울 어느 날 알몸으로 교회당 벽에 붙어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때 세몬이라는 가난한 구둣방 주인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에서 함께 일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미하일은 구둣방 주인 세몬의 아내가 그에 대해 베푸는 배려에서 인간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후 구둣방에서 일하다가 어느 날 어떤 부자가 좋은 가죽으로 그가 신을 장화를 맞추고 돌아가서 바로 죽었기 때문에 그가 주문한 장화 대신에 죽는 사람이 신는 슬리퍼를 찾아가는 것을 보고 인간에게 자기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동안 세월이 흐른 후 한 여인이 쌍둥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구둣방을 찾았을 때 미하일은 그 아이들이 바로 자기가 영혼을 거두어 갈려고 했던 그 어머니의 딸임을 알게 됩니다.
그 어머니는 딸을 낳고 육 개월 만에 죽고 그 쌍둥이 아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다른 여인의 보살핌 가운데서 잘 양육되는 것을 보고 아이는 부모 없이는 살 수 있지만 하나님 없이는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 천사 미하일은 세 가지 과제와 관련된 것을 모두 터득하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 각자는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애씀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뿐, 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찬 있는 자는 하나님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 안에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다 깨닫고 나자 그는 다시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본래 허락된 존재 양식은 사랑으로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게 한 것입니다. 그러한 존재 양식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고 그러한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한 삶에서 위로, 희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삶에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게 되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3. 결국 사랑의 온전함 가운데서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받아 드리지 못하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 자체가 온전함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받아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랑 가운데서는 이러한 모든 것이 극복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이러한 사랑의 온전함이 서로 서로의 관계에서 다음과 같은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우리고 들어주기를 강요하기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우려 들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면에서 생각할 때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고독한 사람에게 위로의 편지를 쓰든가 위로의 전화를 거는 것 모두 사랑의 행위입니다. 사랑은 항상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찾아오기를 요구하기보다 먼저 우리가 그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슬픔을 당해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찾아가서 위로의 말을 해줄 수 있는 것 장기간 병상의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와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일 모두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내가, 내가 하지 않고 사랑은 그러한 이해관계를 넘어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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