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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학고레 삿15:14~20 +
엔학고레 삿15:14~20 +
오늘 본문을 보면 삼손이 나귀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는 승리가 나옵니다. 승리 이후의 감격을 이기지 못해서 삼손이 노래를 짓습니다. 그리고 목이 말라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물을 터뜨려 주셨습니다. 물이 터져 나온 그 샘 이름이 엔학고레라는 샘이 되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한 마디로 말해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순간마다 올바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안에서 승리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어떠한 반응과 과정을 거치고 살아야 될지를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시고 그것을 통해서 매순간 승리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 신앙과 삶의 모든 승리의 원동력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능력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능력의 원천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능력과 권세가 주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겠습니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이 임하니까 묶었던 줄이 불탄 삼같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무기도 아닌 나귀 턱뼈를 가지고 1천 명을 죽이는 승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묶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묶이면 권능이 임하게 됩니다. 삼손이 하나님과 묶이니까 엄청난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자신을 묶는 가장 확실한 통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요4장 23절을 보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예배하는 자에게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삼손의 능력의 원천이 바로 이 예배에서부터,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 예배로 승리한 사람이 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노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촌스러운 노래 하나가 나옵니다. 본문16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 삼손은 하나님이 승리를 주셔서 노래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찬송할 마음이 생겼는데 머리가 없으니까 뭐라고 합니까? 우리 식으로 하면 '나귀 턱뼈로 한 무더기, 또 한 무더기 내가 1000명 죽였어. 이것이 노래의 전부입니다. 노래를 해야 되겠는데 표현이 잘 안 되었습니다. 삼손이 그당시에 무슨 음악공부를 했겠습니까? 만약에 삼손이 좀 수준이 높았다고 하면 찬송가 391장의 노래 정도는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이 정도의 시는 나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삼손도 노래를 지었는데 우리가 노래를 못 지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삼손도 노래를 부르는데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승리자는 노래합니다. 드보라도 승리하고 난 다음에 노래했습니다. 미리암도 홍해를 지나고 난 다음 미리암의 찬가가 나옵니다. 누가 노래할 수 있습니까? 승리자가 노래합니다. 그런데 우리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노래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경이로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신앙이라는 것은 원더플 하는 것입니다. 놀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놀란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이름이 놀람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9장 6절을 보면 "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예수님의 이 다섯 가지 이름 중에 첫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기묘자 히브리어로 필리 불가사의한 기이하고 놀라움이며 영어도 원더풀 카운슬러 (wonderful counselor!) 아주 멋진, 신나는, 훌륭한 경이로운, 불가사의한, 놀라움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놀라움입니다. 주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살면 원더풀합니다. 세상이 다 놀랍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그의 삶 가운데 또한 경이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소서!' 우리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모든 사람이 다 느끼지 못한 덤덤한 곳에서 깊은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시편 8편 4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기자가 왜 놀랍니까? 도대체 인간이 무엇인데 우리를 돌보아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보아 주십니다.' 하면 '그래요?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지요 그러면서 눈물 흘리는 사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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