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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 있는 첫 계명 엡6:1-4절 +
약속이 있는 첫 계명 엡6:1-4절 +
현대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특징은 뉴 에이지 즉 새로운 세대는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 놓는 것입니다. 결과로 부모의 권위, 교사의 권위, 성직자의 권위가 전례 없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21세기의 변화 중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부모의 권위의 추락으로 오는 가정의 붕괴입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가 무너지고 나라가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최초의 사회 단위인 가정이 모든 사회 단위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지탱하는 힘의 근거는 바로 효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효 사상은 천륜이면서도 친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가정이 회복되는 어버이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엡6:1절을 보면“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출20:12절 십계명 중 제5계명을 그대로 인용하여 1절에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 결코 상대적일 수 없습니다. 순종입니다. 복종입니다. 절대적입니다. 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또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1. 옳다는 말은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어준 두 주체로서 무조건적으로 순종하여야 할 대상이 둘 있습니다. 이 두 주체가 없었다면 인간은 그 누구도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천지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과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살과 피를 나에게 나누어주심으로 나를 낳고 키워주신 부모님이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며 우리를 끝없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또한 부모님도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헌신으로 우리를 낳고 키워 주십니다. 따라서 사람은 그분들이 나에게 갖는 존재론적 의미와 아울러 그분들이 자신에게 쏟아주신 사랑으로 인하여 그 분들께 복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고 합니다. 그럼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엡6:2절을 보면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여기에 나오는 공경 <키베드>는 성경에 존중하다, 영화롭게 하다로 번역되어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자식 된 도리로써 부모를 부모로 대접하는 것을 말한다. 잠23:22절에“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 부모가 잘못해도 부모를 경히 여기며 멸시하면 안 됩니다.
2. 어머니는 젖만 먹이며 키우지 않습니다.
탕자 어거스틴이 목메어 애원하는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이탈리아로 도망쳤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그날 이후로 밤마다 울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드디어 어거스틴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는 다란 말이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무디의 아버지는 40세에 별세하고, 유복자 쌍동이를 합해서 아홉 자녀를 키운 무디의 어머니는, 밤마다 벽난로 앞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자녀들이 잠든 후에는 밤을 새워 울며 기도하던 어머니였습니다. 아침에는 햇살처럼 밝고 맑은 표정으로 아이들을 대했습니다.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19명의 자녀를 성자처럼 믿음의 자녀로 키워 감리교의 어머니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이분들만이 존경받을 분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요, 우리들의 어버이들도 희망을 낳고 희망을 기르느라 온갖 심신의 기력을 다 바쳤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어버이의 은혜를 안다면 자연스럽게 어버이를 공경하고 기쁘시게 해드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 전적인 부모님의 은혜로 살 수 있었고, 부모님의 품안에서 부모님의 젖을 먹고. 기도를 먹고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될 때에 영적인 은혜도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기독교의 효는 첫 번째 그 이유에서 차원이 다르고, 두 번째는 그 방법에서 차원이 다릅니다.
신앙적인 효도방법의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살아 계실 때 효도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다음에 제사상이나 차려드리면 되는 그런 효도가 아닙니다. 열 가지 계명 중에 아홉 가지 계명은 평생 나를 따라다닐 수 있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제5계명만큼 어느 날 문득 내 곁을 떠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홉 가지 계명을 내가 범하고 잘못 감당했다고 할지라도 후회할 수 있습니다. 돌이킬 수 있습니다. 새롭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5계명만큼은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송강 정철 선생의 시중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어버이 살아계실 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한번 가신 뒤에 애달프다 어이하리. 생전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
신앙적인 효도 방법의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구원받도록 해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님을 생전에 섬기기를 잘한다 한들 영혼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다고 하면 제대로 효도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지요. 부모님 생전에 예수 믿게 한 자녀는 최상의 효도를 감당한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세상에서 진수성찬으로 대접하고 능라주단으로 몸에 감아드리고 연락으로 즐겁게 해 드렸다 할지라도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여 영원한 멸망을 받는 부모가 되었다면 이 어찌 효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묻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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