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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22:2-12 +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22:2-12 +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기 위해 모리아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그곳에 제단을 쌓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급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그리고 하나님은 이삭 대신에 번제로 드릴 숫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숫양으로 이삭 대신 번제를 드렸고, 그 땅의 이름을‘여호와 이레’라고 지었습니다.‘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의 사역을 특정하는 이름인 동시에 아브라함의 신앙 고백입니다.‘이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미리 본다’‘미리 준비한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미리 보시는 하나님’‘예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도 미리 보고 계시고,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리아산은 어디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있던 그 땅이 여호와 이레가 된 것처럼 우리가 예배하는 그 자리가 ‘여호와 이레’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 이 자리 이 예배의 자리인 여호와 이레 속에는 우리가 깨달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1. 첫째로 여호와 이레
여호와 이레는 주의 백성에게 주실 구원의 계획이 이미 오래전부터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이시기 때문에 주의 백성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창세기 22장을 읽으면서 어쩌면 마음이 불편해 질 수도 있습니다. 창22:2“너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네 아들을 잡아, 태워 드리는 제물인 번제물로 바쳐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렵게 이삭을 주셔놓고 이제는 번제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짐승이 아닌 자신의 자식을 제물로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아들을 제물로 만들려면 각을 떠서 피를 내고 불에 태워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살리기 위해 화목제물로 희생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부터 인류를 향한 구원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때가 되어 예수님을 보내셔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처럼‘여호와 이레’에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준비시키시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2. 둘째로 여호와 이레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풍성한 복을 내려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남의 복을 주시고, 물질과 건강을 주시며 계속적으로 닥쳐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고 소원하는 것보다 더 차고 넘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여호와 이레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었을 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굳게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3일 길이나 되는 모리아산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발걸음에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서 데려가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견뎌낼 수 없는 큰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고난은 믿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변장 된 축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셋째로 여호와 이레
주의 백성에게 있어서 다가오는 고난은 마치 운동선수들이 모래주머니를 달고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주저앉고 싶게 만들지만 결코 우리를 패배시키지 않기 위해. 근력을 키우듯이 믿음을 성장시킵니다. 계속 모래주머니로 운동을 한 선수가 모래주머니를 풀고 달리면, 뛰어가는 차원을 넘어 날아가는 기분이 들 것입니다. 고난의 대명사로 불리는 욥은 이유도 모른 채 고난을 받았습니다. 육체의 질병과 자식들의 죽음, 하나님을 저주하며 떠난 배우자, 그리고 말로 상처를 준 친구들까지 욥은 온갖 종류의 고난을 다 받았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욥에게 퍼부어 하나님을 향한 그의 믿음을 빼앗으려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욥이 다른 모든 것은 빼앗겼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큼은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욥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전화위복의 기회를 여셨고, 그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과하면서 욥42:5“주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 저는 주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며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임을 체험하며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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