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칼럼
현재 위치 : 커뮤니티 > 목회칼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25∼33 +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25∼33 +
약 25년 전에 `속독법 강좌'가 크게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빠를 속' 자에 `읽을 독' 자를 쓰는 속독이란 문자 그대로 빠르게 글을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의 오른쪽 위에서 대각선으로 왼쪽 아래로, 그리고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 대각선으로, 두 번을 훑는 것으로 2 페이지의 글을 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속독입니다. 따라서 300 페이지의 책을 읽는데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 속독론자의 주장입니다. 책 한 페이지를 2초내에 읽을 수 있다는, 황당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속독론자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집니다. 그 경우 그 사람의 눈썹 모양이 어떠했는지, 코끝이 어떤 형태이었던지, 치아의 색깔은 어떠했는지, 뺨에 점은 몇 개나 있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처럼 얼굴의 한 부위 부위는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날 그 사람을 다시 보는 순간 우리는 그를 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잠시 본 사람의 얼굴 윤곽을 기억하고, 그 사람을 다시 알아 볼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성격, 버릇 등 속마음까지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책은 속독으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 채 책의 윤곽만 안다는 것은 그 책을 아니 읽음만 못합니다. 20여분 만에 한 권의 책을 속독으로 끝낸다는 것은 그 책의 내용을 왜곡 되이 이해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속독이란 오히려 그 책과 동떨어지게 만드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1. 빠를 `속', 속히 해치우려는 일치고 해롭지 않은 일이 드뭅니다.
속도란 대단히 편리하기도 하고 그 자체가 쾌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동 장치 없는 속도 브레이크 없는 스피드란 흉기요, 죽음일 뿐입니다. 속전속결로 처리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빨라야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태속에 있는 태아가 10달이 되기도 전에 속히 나오면 그것은 조산이요,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위태로운 일입니다. 속히 해서 될 것이 있고 안될 것이 있습니다. 속히 해서는 안 될 것을 속히 하고자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망치는 일입니다. 그 중에서도 진리를 좇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결코 속히 해서는 안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속단, 깊은 생각없이 속히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속단이 금물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주님의 말씀에 대한 속단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6:25절 보시겠습니다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쉽게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 많은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앞에 있는 21절이 그 좋은 예가됩니다. 21"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즉 주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한 제자들의 근심과 기쁨을, 여인의 해산에 비유하여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는 장면입니다.
2. ‘비사’‘비유’
그러나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비유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을 밝히 일러 줄 것이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비유를 사용치 않을 `그때'는 도대체 언제입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뒤 성령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실 때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밝히 깨달을 수 있도록 영적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주님께서 체포당하시기 직전으로, 부활의 때도 아니요, 더더구나 성령강림의 때도 아닌 까닭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한 말을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 29-30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30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그때가 되어야 더 이상 비유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밝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지금 주님께서 비유를 말씀치 않으셨다고 해서 그때를 지금이라고 주님에 대해 모든 것을 다 밝히 알았다고 속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속단한 제자들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당당하게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님을 밝히 알았기 때문에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주님을 자기 식으로 속단하므로 인한 불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31-32“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32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제자들이 주님을 혼자 두고 각기 제 곳으로 흩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주님을 버리고 배신한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주님을 밝히 알고 주님을 믿노라 확신에 찬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정말 나를 믿느냐, 오히려 너희가 나를 배신할 때가 벌써 왔다고 응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몇 십분 후에 주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배신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