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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18:3-11 +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18:3-11 +
성경의 첫머리인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불과 네 단어로 구성된 아주 짧은 문장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 신앙의 연륜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 한 구절이 성경의 모두임을 절감치 않습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우리를 책임져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고 고치는 방법과 능력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만드신 창조자시기 때문에 피조물된 우리는 그 분의 법도 안에서만 참된 행복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그 분의 법도에서 벗어나려 할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분에 의해 용도가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확실히 창세기 1장 1절은 우리 신앙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 한 절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신구약 합쳐 무려 31,173절이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 한절만으로도 다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머지 31,172절은 왜 필요할까요?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한 구절만으로도 족한 신앙의 경지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의 모든 질문에 답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답변의 하나님 설명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인간에게 바로 그 능력을 부어 주신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불교와의 차이입니다. 불교를 보십시오. 공한, 화두만을 던져놓고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네 스스로 답도 설명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앉아서 답을 얻지 못한 자들이 있는가 하면, 불교의 고고한 진리는 대중속에서 미신화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상하게 설명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자동차를 만든 자가 자동차에 관한 모든 질문에 대해 해답을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질문에 대해 답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답을 인간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수준에 맞추어 되풀이하여 설명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구절로 시작된 성경이 이처럼, 무려 31,173절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엮어지게 된 동기이자 이유입니다. 자기 자식이라 할지라도 계속된 질문에는 끝내 신경질로 답하는 것이 인간인데, 하물며 타인에게는 두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31,173 구절로 인간의 물음에 답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답변의 하나님, 설명의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의 본문 역시 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드리시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가룟 유다가 군대를 이끌고 왔습니다. 바로 그 체포의 순간을,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막 14:44∼47“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가룟 유다 일행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순간, 예기치 않았던 충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곁에 서 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하도록 검을 뽑아 휘둘렀는데, 대제사장의 종이 그 칼에 맞아 그만 귀가 떨어져 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 사이에는 마가복음에 없는 내용이 마26:52-5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가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아니한 이 부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가복음을 통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 사람들 사이에 질문이 제기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자가 체포조에게 칼을 휘둘러 귀를 베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더 이상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어떻게 체포조들은 제자들의 별다른 저항없이 예수님을 잡아갈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며 꾸짖으시고 당신 스스로 체포에 응하셨기 때문이라고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또 다른 질문이 제기 되었습니다. '그때 정말 대제사장의 종의 귀가 베임을 당했다면 그것은 오른쪽 귀인가? 아니면 왼쪽 귀인가?' '그리고 그 종의 귀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을 통해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눅 22:50-51“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그러나 인간의 질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또 제기 되었습니다. '만약 그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라면 그때 칼을 휘둘렀던 사람은 구체적으로 누구며, 또 칼에 맞았던 사람은 실제로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 18:10“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하나님은 이와 같이 인간의 질문에 대해, 무슨 그런 하찮은 질문을 하느냐며 면박을 주시지 않습니다. 거듭되는 인간의 질문을 귀찮아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몇 번이든지 계속해서 답해 주십니다. 아멘!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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