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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요19:6-16 +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요19:6-16 +
조선왕조 500년이 우리 민족 역사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을 말해 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일 것입니다. 한 민족이 고유한 자기 말과 글을 갖지 못할 때, 고유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역사를 지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결국엔 소멸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타민족에 동화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런 의미에서 1446년 9월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중요성과 가치, 그리고 우리 민족역사에 대한 기여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오히려 모자를 것입니다. 그러나 한글창제가 이처럼 역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해서, 전 국민적인 합의나 지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통용되던 한자에 대하여 까막눈이던 백성들은 한글창제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이미 한자에 능숙하던 지배계층 중에는 오히려 반대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공연히 한글 창제를 반대했을 뿐 아니라, 그 반대론자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1444년 경자년 2월 20일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그 당시 집현전 고위 학자였던 최만리에게는 이와 같은 반대 상소문을 올릴 수밖에 없는 개인적 인식과 시대적 상황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상소문을 볼 때, 그의 판단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인생이란 곧 '결정'이요 '판단'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살아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것을 결정해야 하고 또 많은 것들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가 무엇을 염두에 두는가? 우리의 심중이 무엇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입니다.
1. 빌라도의 재판
요18:38절은 빌라도의 재판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요18: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유대인들이 사형에 처해 달라며 끌고 온 예수님을 심문해 보았지만, 빌라도 총독은 아무 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죽이려 함을 빌라도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월절이면 죄수 한 명을 특사로 풀어줄 수 있는 전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하였지만, 유대인 군중들은 오히려 강도 바라바의 특사를 요구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총독 빌라도는 군병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하게 한 뒤,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을 다시 군중들 앞으로 끌고 가 자신이 정당하지 못함을 잘 알면서도 사형을 언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빌라도가 더 염두에 두었던 것은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애써 차지한 총독이란 자리를 공고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 보다는 불의한 다수를 만족케 하는 일을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스스로 자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2. 오늘도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리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만 이 신앙고백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전세계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똑같은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 중의 중죄인이라고 말입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한결같이 정죄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그처럼 지키기를 원했던 그 자리가 빌라도를 평생토록 지켜주었습니까?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그로부터 불과 몇년 후 로마 황제로부터 파면 당한 뒤, 승진이나 다른 보직을 받지 못한 채 갈리굴라 황제때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면에서 그는 목매어 자살한 가룟 유다와 다를 바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3. 변화 받고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갈1: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불의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라도와는 달리 불의한 자들의 환심을 사려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깨달음의 차이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자신, 자기 자리, 자기의 것들을 가장 중요시하여 진리를 미련 없이 버렸다가, 그가 선택한 불의한 자들과 더불어 공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바울은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 오던 모든 것의 무익함을 깨달아, 자기의 것들을 배설물처럼 미련없이 버리고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가 선택했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의인으로 영원한 세움을 입었습니다. 무엇이 진정 자기를 위하는 것인지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자기를 위해 진리를 버린 빌라도입니까? 아니면 진리를 위해 자기를 버린 바울입니까? 옳은 길인 줄 알면서 옳은 길을 가는 자입니까? 틀린 줄 알면서 틀린 길을 가는 자입니까? 영원이란 시간 속에서 최만리의 어처구니없는 한글창제 반대 상소문이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 있듯이, 우리의 전 인생은 하나님 앞에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자기를 위해 진리를 버린 빌라도은 오늘도 사도신경을 통해 단죄되고 있지만, 진리를 위해 자기를 버린 바울은 영원한 진리의 사도로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것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은 반드시 있다는 사실도 망각치 마십시다. 그때에 우리는 지혜로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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