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칼럼
현재 위치 : 커뮤니티 > 목회칼럼
헷세드. 마 5:1-10 +
헷세드. 마 5:1-10 +
바리새인의 종교는 피상적이고 외적이고 또 의식적인 종교였습니다. 다시 한 마디로 얘기해서 껍데기에 관심을 갖는 접근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정한 본질은 겉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면서 바리새 종교를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마23절 27을 보니까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냄새 나고 있다. 이 말씀의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내면이 중요한 것이다. 8복에 대한 모든 내용들이 내적인 의에 대한 접근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이냐 하면 내적인 의가 다른 행위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행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이 있는데 행동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의가 이루어지면 그것이 저절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성품에서 나오는 행위,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의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일을 행하기 이전에 이미 의로운 존재다.’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의로운 일을 행하기 이전에 의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행동이 변화되면 존재가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변화되면 행동이 변화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 8복은 4개 4개가 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특별히 이 다섯 번째 복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치 조건 같지요. 사람들이 이것을 공적(노력과 수고를 들여 이루어 낸 일의 결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잘못된 접근입니다. 이것은 공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의미와 가깝습니다.‘긍휼히 여김을 받은 사람만이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용서받은 사람만이 또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8복은 4개 4개가 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앞의 4가지는 내적인 태도를 의미하고 뒤에 나타나는 4가지는 태도가 나타내는 결과입니다.
첫 번째 복이 무엇이었습니까?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긍휼을 자세히 풀어보면 영어로는‘자비를 베풀다’이런 뜻으로 번역이 많이 되어 있고 성경에는 인자, 은혜 이런 식으로 번역이 여러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헷세드라는 것입니다. 헷세드라는 단어는 사랑이라고 번역하고 또 호세아서에서는 인애라는 단어, 인애가 있고 사랑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한 마디로 얘기해서 행동 있는 사랑을 헷세드라고 하고 행동이 있는 사랑을 긍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2. 우리는 긍휼의 산물 이유없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실제 하나님 앞에서 많은 긍휼을 받고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긍휼이라는 것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친절입니다. 자격이 전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이 자리에 서있는 이유가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거가 나한테 없다는 것입니다.
더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면 창세기 32장 10절보면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 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여기에서 은총이라는 단어가 헷세드입니다. 이것이 또 긍휼이에요. 야곱의 이야기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 도망치고 그 다음에 돌아올 때까지 야곱이 하나님께 긍휼을 받을만한 근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잘한 것이 무엇이 있어요? 아버지 속이고 형 속이고 그가 잘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야곱을 연구할 때마다 당황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은혜를 주셨는지 근거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것이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이유 없는 사랑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의아해 합니다. 자꾸만‘왜’를 물어요.‘왜 구제해요.’‘여기 왜 왔어요?’왜? 왜? 왜 우리는 대답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긍휼이야.’어떤 사람이 치밀하게 합리적으로 다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이가 딱딱 맞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인본주의자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긍휼을 맛본 사람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자기 인생을 채워갑니다. 이유를 모릅니다. 그것이 긍휼이라는 것입니다.‘나도 이유 없이 사랑받았기 때문에 나도 이유 없이 품어 주셨기 때문에 나에게 바로 그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시편 37편 21절을 보면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은혜라고 번역된 것이 헷세드입니다. 의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긍휼은 또 다른 말로 보면 용서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긍휼이 있어야 용서가 있어야 성장합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스라엘백성들도 용서의 산물 아닙니까? 야곱의 아들이 12명 있었습니다. 12명이 있었는데 11번째 아들 요셉을 팔아 먹었지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수같던 10명의 형제를 만났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용서를 베풀지 않고 긍휼을 베풀지 않고 ‘너희들 네 죄를 네게 알렸다. 목을 쳐라!’ 10명의 형들의 목을 쳤다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두 지파밖에 없잖아요. 요셉과 베냐민! 이스라엘 지파가 생긴 것이 긍휼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