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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여, 네가 복이 있도다
해마다 부활주일 새벽 5시에 근방 13개 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연합하여 부활절 새벽예배를 드린다. 올해에는 〇〇교회 목사님이 설교를 했다. 제목은 “부활의 증인들”이었다. 성경말씀은 마가복음 16장 1~11절이었다. 목사님의 설교 중에 나는 특별하게 마음에 와 닿은 부분이 있었다. 바로 부활의 아침에 맨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천사로부터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을 생생하게 들은 사람들이 여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여자들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성경에서도 당시에 여자들은 남자들보다도 더 많이 운집했을 테지만 수에도 쳐주지 않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던 현장에서도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14:21)”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요한을 제외한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도 여자들이었다. 부활의 아침에도 제자들은 예수님과 엮이게 될까봐 두려워서 깊은 방속에 꼭꼭 숨어 있을 때 여자들은 용감하게 향품을 사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맨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우리 교회에서도 부활주일 아침에 부활절연합새벽예배에 참석하러 새벽 4시 30분에 출발했는데 남자는 3명, 여자는 10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믿음이 더 견고한듯하다. 물론 부활절새벽예배에 참석한 것이 반드시 믿음의 척도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아무튼 그날 새벽에 새벽잠을 떨치고 일어나 차가운 새벽공기를 마시며 오소소 떨리는 몸을 움츠리고 의자도 없는 강당 바닥에 쪼그려 앉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찬양하며 경배한 사람들은 여자들이 남자들의 3~4배는 되는가 싶었다.
설교하신 목사님도 그 점을 지적했다. 부활의 증인들이 제자들보다도 오히려 당시에 천하고 멸시받고 소외된 계층의 여자들이었다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주위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남자들은 듬성듬성 앉아 있었고 주로 여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 교회에는 성도의 구성비가 주일오전예배 때 여자가 남자의 3~4배가 된다. 그런데 주일오후예배 때에는 더욱 더 심해진다. 남자 성도들은 대부분 점심식사를 하고 집으로 간다. 여자 성도들은 특별한 일이 있는 사람만 가고 거의 모두가 식사 후에도 남아서 교제를 나누고 오후예배까지 참석하고 간다. 주일오후예배 때에는 남자는 5~6명 되고 나머지는 여자이니 여자의 수가 남자의 7~8배가 된다.
가끔 결혼이 늦은 젊은 그리스도인 자매들에게 왜 결혼을 안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은 “신앙 좋은 결혼 상대자가 없다”는 것이다. 도시 교회에서도 청년부에 신앙 좋은 자매들은 많은데 형제들은 귀하다는 것이다. 가끔 저 형제는 참 신앙이 좋으니 사윗감으로 적격이겠구나, 싶어 말을 건네 보면 어느새 약혼자가 있거나 연인이 있더라는 것이다.
어느 사모님은 딸만 둘이다. 딸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만나 어떤 신랑감을 구하는가 물었다. 20대 중반에는 딸들이 장래 목회자가 될 사람하고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고 했다. 왜 그런가 하니, 목사인 아버지가 젊어서부터 전도사, 강도사, 목사를 거치면서 작은 시골 교회에서 어찌나 가난하게 쪼들리게 살았던지 몸고생, 마음고생이 심했었던가 보았다. 그래서 목회자 아내가 되면 으레 가난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데 그게 두렵다고 했다. 그러나 나이가 차도록 신랑감을 구하지 못했다. 신학을 하고 있지 않은 남자 중에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온 그들의 눈에 찰만한 신앙 좋은 배우자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두 딸은 늦은 나이에 신학도와 결혼을 하여 지금은 둘 다 사모가 되었다.
나는 어려서 남아선호사상에 젖은 어머니로부터 오빠와의 차별대우를 받으며 자라면서 마음이 많이 상했었다. 나는 간혹 내가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바랐던 때가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자손이 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맏딸로서 아홉 살 터울의 삼대독자 남동생이 교통사고로 고등학교 다닐 때 죽는 불행을 겪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결혼해서 아들을 많이 낳고 싶어 했다. 다행히도 결혼하자마자 첫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둘째는 딸인 내가 태어났다.
게다가 나는 딸을 터 팔아서 내 다음으로 또 딸을 낳았다. 그것이 마치 나의 잘못이기나 한 것처럼 나는 어려서 홀대를 많이 받았다. 물론 어머니는 모든 아이들을 평등하게 키웠노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느냐면서, 그러나 아니다. 과거에는 집마다 딸들이 홀대를 당하고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던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나는 교육열이 높은 아버지 덕분에 오빠와 동등한 교육을 받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복되다고 생각하며 산다. 내가 남자였더라면 지금처럼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라는 의구심을 갖는다. 내가 여자였기에 더 예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 외에도 세상에는 여자이기에 더욱 복된 자들이 많이 있다.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그렇고, 배속에서부터 하나님께 택함 받은 야곱에게 이삭의 후계자가 되도록 끝까지 언약을 붙든 리브가가 그렇다. 부활의 아침에 향품을 사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고,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값비싼 자기의 전 재산인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려 예수님을 최고로 대접한 마리아가 또한 그렇다.
마가복음 12장 25절에서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했으니 하늘나라에서는 여자도 남자도 구별이 없을 테니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이 세상에서는 여자는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상대적인 천대와 소외를 받으며 산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낮음이 오히려 복음을 접하는 데에 더욱 유리했음을 생각할 때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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